새벽 다섯 시쯤 눈을 떴다. 12월 31일,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나간 아들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내는 잠에서 덜 깬 채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기분 좋게 취한 듯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있다며 곧 들어오겠다고 했다. 다행이다. 길거리에서 자고 있지는 않으니.
며칠 전,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아내는 아들에게 한 캔 마셔 볼 거냐고 물었다. 주량을 미리 알아둬야 한다는 이유였다.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고등학생 신분을 지키느라 지금까지 술을 안 마신 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참겠다고 했다. 이제 아들은 나라로부터 술을 마실 자격을 얻었다. 커다란 전리품을 손에 쥔 아들에게 월출산 일출을 보러 가자는 내 시시한 제안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막상 날이 밝아 오자 나도 망설여졌다. 새벽 두 시를 넘겨 잠들었고, 구름이 많다는 예보도 있었다. 일출을 볼 확률은 20% 남짓이었다. 그래도 다시 침대에 눕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작년 새해에도 월출산에 올랐다. 숲은 암흑에 잠겨 있어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낙엽 밟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랜턴 불빛에 의지해 앞만 보고 걷다 보니, 여러 생각이 차오르며 자연스레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들었다. 그게 새벽 산행의 마력이었다.
작년에는 시간 예측을 잘못해 산꼭대기에서 한 시간 넘게 추위에 떨었다. 이번에는 서두르면 일출 시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복에 기모 안감 바지, 털 달린 셔츠와 노란색 파카를 꺼내 입었다. 귀마개와 마스크도 챙겼다. 조금 과한가 싶었지만, 정상에서 마셨던 커피가 떠올라 따뜻한 물과 믹스커피도 넣었다. 생수와 귤 세 개, 헤드랜턴과 비상용 레시, 보조 배터리를 크로스백에 담았다. 준비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먼저 산으로 가 있었다.
여섯 시 10분쯤 경포대 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이미 차들로 가득했다. 공터에 차를 세우고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능선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의 불빛도 반짝였다. 별과 불빛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포대 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해 경포대 삼거리, 약수터와 경포대 능선 삼거리를 거쳐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일출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월출산의 암석과 절경을 즐길 수 있는 바람재 삼거리 쪽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빠르게 정상에 오르는 게 중요했다. 바람재에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계단과 암석이 많아 살얼음에 미끄럽기 쉽고, 능선을 타야 해 바람도 거세다.
헤드랜턴을 켜고 등산로로 들어섰다. 이제 한 시간 반 남았다. 시간이 빠듯했다. 다른 사람들도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초입부터 경사가 느껴졌다. 발밑의 흙과 돌이 랜턴 불빛에 번갈아 드러났고, 한 발 한 발에 힘이 실렸다. 마스크 너머로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가 하얗게 빠져나갔다.
여섯 시 30분, 경포대 삼거리였다. 다른 등산객들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정상까지 거리는 짧은 대신 경사는 더 심했다. 숨이 차올랐다. 고개를 들면 앞사람들의 불빛이 줄지어 흔들렸고, 등산화 뒤꿈치의 야광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더 힘차게 걸으면, 앞자리를 양보받을 것 같았다. 그러면 선두가 된다. 숨을 크게 몰아쉬다, 앞지를 뜻은 없다는 걸 보폭을 줄여 몸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선두에 서게 됐다. 새벽 산행에서는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여섯 시 50분, 약수터 표지판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을 둘러싼 신호대가 바람을 막아 주어 잠시 포근했다. 숨만 고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경포대 능선 삼거리부터는 바람의 결이 달라진다. 숲이 막아 주던 찬 기운이 그대로 살을 에다.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귀마개를 다시 눌러썼다. 먼 산 능선에는 여명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하나둘 보였다. 일출을 보지 않고 내려오는 그들의 이유가 궁금했다. 젊은 남녀가 계단을 따라 힘겹게 내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조금 전까지 정상에 있었는데, 조금만 더 버텼으면 응급 헬기를 불러야 할 뻔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그저 추위를 과장한 농담처럼 들렸다. 살얼음이 낀 계단을 한 칸 한 칸 조심스레 올랐다. 랜턴은 주머니에 넣고 발밑에만 신경을 쏟았다.
일곱 시 27분, 천황봉에 올랐다. 백여 명이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동쪽 산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상의 바람은 그 여자의 말처럼 예사롭지 않았다. 머리카락 끝이 하얗게 얼어붙는 감각이 느껴졌고, 세찬 바람에 몸이 휘청이기도 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를 켰지만, 추위 때문인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굳은 손으로 셔터를 누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그 순간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고, 해는 능선 위로 붉게 타올랐다.
내년 새해에는 월출산에 오르지 못할 것 같다. 올해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을 예정이다. 처음으로 과장이라는 직위도 맡게 될 것 같다. 여러 직원과 함께 과를 이끌 일을 떠올리니 두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설렌다. 내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올해처럼 충만하기를 기원했다.
해는 금세 산등성이 위로 올라섰다. 정상에 모였던 사람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제각각 흩어졌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수월했다. 약수터에서 언 몸을 녹이기로 했다. 보온병을 꺼내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커피 한 잔을 건넸다. 미지근하면서도 달콤 블랙커피였다. 그 맛이 작년에 천황봉에서 얻어 마셨던 커피와 비슷했다.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찬찬히 보니, 작년에 커피를 건넸던 사람이었다. 목포에 산다는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천황봉에 오른다고 했다. 작년에도 이곳에서 일출을 보았다고 했다. 틀림없는 그분이었다. 새해 첫날, 기분 좋은 인연을 다시 만났다. 이것 또한 월출산 산행의 마력 아니겠는가!
열두 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했다. 아들이 부스스한 머리로 방에서 나왔다. 소주 두 병을 마셨는데, 숙취가 없단다. 술을 잘 마시는 것 같다고 으스댄다. 아들은 노래방 화장실 소변기에 구토해 다 치우고 왔다고 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아들은 술을 마실 자격이 있었다. 나는 그날 오후 꽤 곤한 낮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