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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산책 Aug 15. 2020

그가 나를 배려하는 방법

그는 나에 대한 미담을 만들어 가는 중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논 한복판. 가만히 앉아 쉬는 것을 못하는 신랑이 밭에 가겠다고 했을 때 나도 따라나섰다. 아까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걷고 싶었는데 지금은 해가 쨍쨍이라 걷고 싶지 않다.

- 여보, 못 걷겠어. 해가 쨍쨍이야. 어디 앉아있을 곳 없을까?

- 저기 나무 밑 어때?

- 의자가 없잖아.

- 차에 있잖아.

주말에 캠핑을 가려고 밭에 있는 캠핑 의자를 차에 실어 두었다.

그는 차를 몰아 우리 밭과 80m 정도 떨어진 나무 그늘로 간다. 그리고 의자를 내려 자리를 잡아준다.

- 밭에서도 네가 보이니까 위험하지 않을 거야. 벌레는 어쩔 수 없겠지만.

- 벌레는 내가 처리하겠어.

그가 차에 들어가 창문을 내린다.

- 즐거운 시간 보내.

- 당신도.

그와 나는 잠깐 작별한다. 그리고 나는 이걸 글로 쓰고 있다.

그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안다. 바람, 초록, 걷기, 명상의 시간 등. 그와 완전히 다른 취향이지만 있는 그대로 봐준다. 그와 내가 보낸 시간이 준 선물이다. 결혼생활이 오래되어 좋은 점 중에 하나. 밭에 있는 컨테이너에서 신랑도 선물을 누리고 있다. 목공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말이다.

  

캠핑의자에 앉아 앞을 보니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다. 하늘과 초록을 보고 '멍 때리기' 정신 건강에 좋다.


신혼 초 기념일을 전혀 챙기지 않는 신랑 때문에 서운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은 그런 마음을 토로했다.


내가 뭐 크고 비싼 걸 바라는 게 아냐. 그냥 '나를 생각해주는구나!'를 느끼고 싶은 거라구. 소소하게라도 마음을 표현해 주면 안 돼?


다음 날 신랑은 소소하게 양말을 사 왔다. 엎드려 절은 받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속옷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그 이후로는 뭘 받았지?


이제 기념일은 나에게도 그다지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기념일 챙기는 게 나도 재미없어졌어. 당신이 나보다 먼저 그걸 느꼈던 거구나! 기념일에 멋진 거 말고, 매일 멋지게 살자.     


그의 배려로 나는 한여름에 논 한가운데 나무 그늘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시원한 바람이 스쳐 간다. 그는 나에 대한 미담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신랑 모르게 신랑 자랑

신랑이 만들어준 적삼목 침대. 나무 향이 좋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그는 나를 위해 침대를 만들었다. 더위로 인해 깊이 잠들지 못하던 내가 어젯밤에는 푹 잤다.(어젯밤 개시) 신랑은 내 글을 읽지 않지만, 그에게 사랑을 전한다. 사랑의 에너지가 돌고 돌아 당신에게 닿기를... 어제 침대를 마무리하고 신랑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의미 있는 거 만들었네."

나는 생각한다.

'당신 존재 자체가 나에게 의미 있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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