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어야만 했던 이유
- 치명적인 스포일러 포함합니다.
처음엔 마냥 이 영화가 좋았다.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극, 배우, 히어로, 드럼 소리, 무대의 백스테이지, 기술적 롱테이크. 거기다 배우들의 호연과 극적인 스토리까지. 물론 단점도 확실한 작품이다. <레미제라블>처럼 스타일을 일관하여 강약의 조절이 미비한 점, 다소 애매하다고 보이는 결말.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쇼 비즈니스의 우스꽝스러움? 예술가의 고뇌? 인간 내부의 균열? 어느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영화 <버드맨>은 그런 부분이 가장 매력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돌려서 영화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건 바로 인간으로의 존재란 관점이다.
리건 톰슨 내부의 ‘버드맨’이란 인격은 환상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존재가 보여지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실체가 나타나고 동시에 리건 자신의 자아에는 커다란 흔들림이 찾아온다. 동시에 리건 톰슨에겐 초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일부러 초능력이 실재하는 듯 보여주다가 극 중 인물의 시선으로 그것이 리건의 환상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적어도 리건의 세계에서 그는 완벽한 존재였을 것이다. 공중부양에 날 수도 있고, 염력까지. 신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는 그런 힘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다른 면에서 인정받고자 한다. 왜 그는 자신의 세계에 도취하지 못한 채 사회 속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걸까.
리건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 속 리건이 하는 발언들과 연관 지어보자. 그는 좋은 아빠가 되길, 우수한 배우가 되길, 스스로 올린 연극이 인정받길 원해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좋은 인간이란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지은 것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이다. 즉 타인의 거울로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는 슈퍼스타로서 살았다. ‘버드맨’이란 히어로로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등진 아빠가 되었다. 히어로라는 상징으로 치환된 인간. 그래서 삶이 이미지에 갇힌 채 개인의 역할을 하지 못한 인간. 그게 리건이란 인물의 전사다.
사실 <버드맨>의 세계는 ‘구분’이 중요하다. 배우는 실제 나와 극 중 나를 넘나드는 직업이다. 그러나 리건은 자신의 만들어진 이미지 ‘버드맨’으로부터 분리되지 못한다. 오히려 초반에는 거의 합일의 상태, ‘버드맨’의 실체는 이미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점점 인간으로서의 난관에 봉착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상태는 분리되어간다. ‘버드맨’의 형태가 드러나는 것을 시작으로 리건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 혼란으로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열망하던 배우의 모습으로 죽기를 선택한다.
예술을 구분 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평론가는 리건의 연극을 극찬한다.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그러나 그 연극은 리건이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실재’가 섞여있다.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은, 결국 평론가 자신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이며, 또한 그 평론 자체가 리건의 자살기도 소식과 엮기며 그의 인기를 모으는데 일조했다는 것 역시 예술과 평론이란 고급 문화의 일부가 실제로는 쇼 비즈니스의 일부임을, 우리가 사는 삶의 일부임을 지적하고 있다.
왜 하필 히어로가 ‘새’인가. 지금의 새라는 건 오히려 조롱에 자주 쓰이는 상징이다. 그러나 본래 새는 하늘을 나는 동물이다. 인간의 숙원과도 같았던 비행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가장 먼 존재이고, 신의 형태나 성수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버드맨’은 어쩌면 ‘인간’인 리건과 가장 반대인 새라는 동물과 만들어진 이미지로서의 히어로를 섞은 것이 아닐까 싶다.
‘버드맨’을 신성의 상징으로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리건이 다시 스타덤에 올랐을 때, 그의 SNS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연극은 성공적인 평론을 만들고 샘이 드디어 그가 좋아하는 꽃을 가져왔을 때. 그때야 그는 마스크를 벗는다. 그리고 그 부상마스크를 벗고 거울을 마주했을 때, 그의 ‘버드맨’은 변기에 앉아있다. 변기는 무엇인가. 배설이란 행위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배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와 같다. 그의 버드맨, 과거, 화려했던 순간이 가장 인간적인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그는 그럼 어디에 있는 걸까. 바로 자신이 꿈꾸었던 그 순간에 도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영화의 끝에서 마침내 리건이 날아오른 듯 샘이 미소 짓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리건은 다시 신의 자리-스타덤에 올랐으나 그것은 내부에서 인간성이 살아남-자살이란 행동으로 개인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 때문이다. 아마도 상징적인 행위로 드러났다고 판단한다. 리건은 아마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 보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이지 관객의 몫이다. 그러나 그간의 초능력이 타인의 시선을 거치면 실제가 아님을 드러나듯 마지막 샘의 미소는 최소한 리건이 진짜 자신으로 거듭났다는 걸 나타낸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