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지켜라!

형식과 메시지의 일체

by sothaul

2010년, 다음 웹툰에 어떤 만화가 연재되었다. 제목은 <크리킷 마스크>. 당시 웹툰 댓글란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 작품은 8부작 정도 되는 짧은 내용이었다. 공장 노동자인 주인공이 실은 외계 생물체와 싸우는 영웅 ‘크리킷 마스크’라는 전대물적 스토리가 주된 내용이었는데, 문제는 그 디자인이었다. 크리킷 마스크의 디자인이 일본의 전대물 가면라이더와 지나치게 유사하는 지적이었다. 독자들은 처음에 작가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의견이 냈다. 그러나 2주, 3주가 되어가면서 작가가 어떤 반응도 없이 연재가 계속되자 사람들은 점점 비판을 넘어 비난의 소리를 높였다. 양심도 없다는 식의 반응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표절시비를 일으킨 아이템 자체가 하나의 플롯이었다. 알고 보니 그 주인공은 그저 전대물 마니아였고 자신이 히어로라는 망상에 빠진 채 악당, 즉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들을 죽이는, 스스로가 천하의 악당이었다는 설정이었다. 이 이유에서 크리킷 마스크는 당연히 그의 우상이었던 가면 라이더를 닮았던 것이다. 이런 반전이 마지막화에서 밝혀지자 사람들은 작가의 연출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후기에서 언급하듯 작가 역시 그런 표절시비를 해명하고 싶었지만 해명하자니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발설하는 역설에 빠지기에 꾹 참았다고 한다.

그 <크리킷 마스크>는 음울한 이야기를 전대물로 위장함으로써 새로운 플롯으로 만들어냈다. 그 지점에서 <지구를 지켜라!>는 이 웹툰과 상당 부분 닮아있다. 주인공이 망상에 빠진(것처럼 보이는) 캐릭터이며, 본래의 스토리와는 다른 컨셉을 차용함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는 것, 무엇보다 끝까지 보지 않으면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이 닮아있다.

<지구를 지켜라!>는 SF 코미디를 표방한다. 최소한 그런 것처럼 모두를 속이고 시작한다. 도입부에서 병구와 강사장이 다투는 장면만 봐도, 사실 병구의 의상만 봐도 이 영화는 코미디처럼 굴고 있다. 추형사가 주차장을 나오는 장면 직전, 경찰견을 보는 추형사의 P.O.V.가 붙는 건 이 영화가 쇼트끼리의 상호작용을 코미디처럼 이용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잘 알려진 이태리 타월, 물파스가 무기로 사용되는 것처럼 일상적인 물품이 일반적이지 않은 용도로 쓰이는 것 역시 코미디를 의도한다.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곳곳에서 우연을 가장한 코미디적 전개도 종종 보이는데, 대표적인 예는 강사장이 자신이 죽인 병구를 발로 찍다가 다시 살려내는 부분이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이 전개는 이전까지 끊임없이 깔아 둔 “이 영화는 코미디입니다”라는 위장술 덕에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차후 전개되는, 애초 병구의 정당성이 확립되지 못하는 중반부부터 영화는 내용과 형식의 불일치를 만들고 관객은 혼란을 겪는다. 이것 역시 이 영화가 메시지를 말하는 화법이다.

왜 코미디가 위장이냐고 의문을 갖는다면 그건 그 코미디를 성사시키는 과한 비장미가 결말을 통해 실제로 비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후반에 가기 전까지는 굉장히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병구가 정말 외계인을 잡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도피에 불과한 약쟁이인지 결정적인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때문에 첫 쇼트의 대사와 음악도 비장하지만 우스꽝스럽게 보이고 진지한 독백 역시 그의 비장함 덕분에 한층 더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병구의 과거가 나오고 강사장의 설명 시퀀스가 지나가고 나면 (그 후에도 모호하게 표현하지만) 그의 비장함이 실질적인 것이었음을 드러나면서 영화의 분위기 자체가 뒤바뀐다. 결국 이 ‘비장함’의 실제적인 형태를 일부러 나중에 드러냄으로써 영화 전반부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가볍게 보이게끔 연출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비롯한 홍보)를 문제삼았지만, 반대로 그 누구도 이 영화의 홍보 형태를 제시하진 못한다.

이러한 전반부와 후반부의 의도적인 충돌을 함축적으로 잘 나타내는 쇼트는 강사장을 고문하기 직전의 쇼트가 있다. 이 부분에서 병구는 딜도를 연상시키는 ‘무기’에 젤을 손으로 섬세하게 바른다. 여기서 ‘딜도’라는 형태가 주는 성적인 감각과 그러나 병구에 대사에서 알 수 있는 가학성, 혹은 더러움이 충돌한다. 특히 이 쇼트 바로 직전엔 C.U.으로 몽타주를 만들어서 (전반부에 중요 포인트인) 과장한 비장미를 선보여서 한층 더 이 쇼트를 인상적이게 짚어준다. 어쩌면 극 중에 꼭 필요한 장면이 아님에도 이토록 공을 들인 소품과 무빙으로 강조하는 것도 이 영화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장면 외에도 전후반부의 분위기 양상을 정확히 나타내는 것은 강사장의 탈출 시도 시퀀스까지에서 등장하는 BB탄 총과 강사장의 설명 이후 병구가 쏘는 실제 총이다. 전자의 총은 마치 당장이라도 강사장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주사를 쓰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고, 후자의 경우 실제로 해를 가할 수 있지만 정작 쏘지는 못하는 허울에 불과하다. 전자는 전반부의 과장된 비장함을 상징하고, 후자는 그 강력한 무기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상징한다. 특히 진짜 총으로 거울 속 강사장을 쏘는 행위는 거울, 즉 자기 자신에게 발사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가정할 경우 그 강력한 무기로 자멸하는 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

<지구를 지켜라!>가 SF적 코드를 차용하고 있는 것은 스토리만이 아니다. 정확히 짚어보면 연출적인 면에서도 그 코드를 잘 이용하고 있는데, 특히 “시간”이란 부분을 기가 막히게 사용한다. 타이틀이 나오기 전 오프닝 시퀀스에서 강사장은 사진 슬라이드를 통해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강사장은 계속 점프컷으로 이어진다. 반면 슬라이드 이후 등장하는 병구는 (비장미가 넘치는) 롱테이크가 첫 쇼트이고, 강사장에 이어 등장하는 주차장 장면도 그의 등장부터는 점프컷이 없다. 과연 그저 템포를 위한 연출이었을까? 이 부분이 병구는 시간을 지나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며, 강사장은 그보다 긴 세월을 사는, 스스로 언급하듯 상대적인 우주의 시간을 사는 외계인이란 설명으로 볼 수 있다.

또 이 장면에서 왕자인 강사장이 외계인과 교신하는 쇼트를 넣으면서도 포커스를 아웃시켜서 마치 그냥 술주정처럼 보이게 하고, “어머니 생신은 뭐 매년 있어?”라는 복선을 드러내는 것은 눈앞에 드러나는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찰이나 혹은 관객까지 통째로 조롱한다.

몇몇 중요한 상징물이 등장하는데 인상적인 것은 역시 마네킹이다. 병구는 부업으로 혹은 주업으로 마네킹을 제작하는데 이것은, 그 지하가 외계인 고문을 위한 공간이란 걸 염두 한다면, 비인간적인 것들로 가득하다는 의미가 된다. 강사장이 2차 탈출을 하고 바로 마네킹쇼트가 붙고, 마네킹들 앞에서 주저앉아 치료하는 장면, 탈출하려다 감전당해 떨어진 곳이 마네킹더미 위인 연속적인 쇼트들은 마네킹→비인간인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순이가 꾸미며 놀던 바비인형도 꽤 상징적이다. 이 영화는 2시간 내내 일반적인 범주에서 예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바비인형이 상징하는 ‘미인’의 개념은 그 목이 부러진 것처럼 이 영화에서 아예 다르게 등장한다. 병구가 사랑했던 첫사랑은 아예 죽어가는 모습으로만 등장할 뿐이며, 동네 술집 여자 역시 아름다움과는 꽤 거리가 멀다. 이것은 단지 미인의 개념을 떠나 여성들은 언제나 피해자라는 관점을 짚어준다. 작품 내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으며 모두 남자의 행위 때문에 죽어버린다. 그래서 예쁘장한 바비인형은 곧 이 사회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존재한다 해도 그저 타인에 의해 꾸며졌을 뿐인 여자를 상징한다.

그리고 언뜻 지나가는 듯하지만 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인데, 이들은 순이가 병구에게서 떠나는 장면과 결말에서만 등장한다. 왜 그들이 등장하는 걸까. 딱 봤을 때 떠올랐던 이미지는 이 영화보다 1년 전에 개봉했던 <집으로>이다. 이것은 어쩌면 <집으로>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지구가 파괴되는 마지막 결말이 그야말로 돌아갈 집이 없어졌다는 표현임을 극대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순이와 같은 버스를 타고 있던 소녀와 할머니, 그들은 각각 순이의 과거와 미래로 대입시킨다면 지구가 폭발하는 그 순간, (이미 순이는 죽었지만) 더 이상 다른 순이의 존재가 모조리 사라진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꽤 가학적이다. 아마도 영화를 기대하고 봤던 관객들이 느꼈을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을 것이다. 왜,라는 물음에 확실한 대답도 주기 전에 강사장은 고문당하고 병구는 고문한다. 때로는 둘의 역학관계는 뒤집히기도 한다. 순이가 떠날 때 병구는 자신의 뺨을 계속 때리고, 옆 TV에선 마치 강사장이 이를 지켜보듯 영상이 나온다. 강사장이 탈출하려고 온몸을 가학하는 장면도 끈질기게 보여준다. 관객은 도망갈 곳도 없이 불쾌함을 느끼며 이 모든 걸 마주할 수밖에 없다. 왜 이 영화는 흥행에 도움되지도 않는 가학성을 굳이 강조했을까?

이것은 병구와 강사장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병구는 “고통이라는 건,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거든.”고 말하지만 강사장은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가장 쉽게 변할 수가 있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이 영화가 왜 가학적인 코드를 끊임없이 집어넣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고통을 겪고 나야 이 변화하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작품은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스스로 그런 태도로 빚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에.

더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위의 대사와 이어지는 강사장의 말로 바로 요약이 가능하다. “일부러 너희들을 못 살게 군 것도 다……!” 이 모든 가학성은 관객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직면하고, 그런 군상을 마주해야 비로소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였다.

<크리킷 마스크>를 떠올린 것도 이 지점이다. 최근의 예술 작품들이 현실의 비참함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적인 소재를 택하고 그것을 있을 법한 이야기로 꾸며낸다면, 두 작품은 정반대의 지점을 택한 것이다. 있을 법한 얘기를 전혀 다른 형식으로 꾸며내여 그 중심의 메시지를 더 세게 전달하는 것. 특히 <지구를 지켜라!>는 고통을 직면해야 변화한다는 메시지와 그 형식을 완벽하게 일치시켜 코미디-비극이라는 충돌적인 요소를 안고 가면서도 일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특히 지금까지 군상을 몽타주로 보여준 후 크레딧에서는 병구의 순수했던 모습을 병치시켰던 것은 그 태도를 더욱 굳건히 한다.

물론 그러한 선택 때문에 관객 동원수는 형편없게 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고도 볼 수 있다. 대다수의 관객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즐거움을 즐기기 위해 극장으로 향한다. 그 즐거움은 최소한 고통스럽더라도 어떤 감정적인 정화, 카타르시스를 거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지구를 지켜라!>가 선택한 방식은 고통을 수반한 화두에 가까웠고 그 많은 노력에도 결국 지구가 멸망한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대실패이다. 카타르시스는 온데간데없고 관객은 감독의 우회적인 꾸짖음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느꼈을 것이다. 그 지점은 아마 영화 내의 가학성, 충돌적인 분위기와는 별개로 어떤 불쾌함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 수치상에선 실패작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결국 재평가받을 수 있는 건 그런 뚝심 때문이었다. 호불호를 떠나서 <지구를 지켜라!>는 정말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무장르성을 가졌고, 거기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배우들, 무엇보다 지금 봐도 먹힐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다. 장준환 감독은 차후 <화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인간의 폭력성을 다루었고 여기서도 미약하게나마 ‘괴물’이란 아이템으로 그 뚝심을 밀어붙인 바 있다. 데뷔 11년 차의 이 감독이 두 작품만으로 한국 영화계에 힘을 불어넣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독의 다음 작품을 상상하는 것이 큰 즐거움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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