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로서의 폭력은 허용될 수 있는가
<폭력의 역사>는 어떤 영화일까. 이 영화를 예전에도 봤었지만 다시 보면서도 그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었다. 단순한 한 가족에 폭력이 스며들며 일어나는 파장을 그린 것일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보듯 폭력의 전염성에 관한 영화일까. 평론가들이 분석하는 미국역사 저변의 폭력을 말하는 걸까. <폭력의 역사>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이다. 한 가족을 다루면서 동시에 이름에 내포된 거대한 의미가 만드는 기묘한 시너지.
그래서 분석을 위해 반복 관람했을 때, 문득 이것이 정말로 폭력의 “역사”가 맞을까 생각이 들었다. “폭력”의 역사라고 보면 다른 것이 보지 않을까, 생각을 전환하자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폭력 그 자체임을 느낄 수 있었다. 크로넨버그는 인류 역사 전체를 폭력이란 시선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폭력의 시작을 “자아”라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자아”는 자신의 것을 보호하고 나아가 다른 이의 것을 탈취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서의 존재다.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기원으로 이 욕망의 존재를 지적했음이 분명하다. 작품 내 모든 폭력은 빼앗으려는 것에서 시작, 자신을 보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감독은 이런 시선을 작품에 완벽히 스며들게 했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표현방법은 “단독샷”이다.
이 영화의 대부분의 대화장면은 O.S.가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롱테이크도 아니다. 거의 모든 인물의 컷이 단독샷이다. 왜일까. 여기서 감독은 프레임을 하나의 영토, 영역으로 변환시켰다. 우리가 보는 컷은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알게 모르게 그 영역을 보호하려고 한다. 처음 가족들이 모여 아침을 먹는 장면을 보면 어제 밤에 그렇게 사이 좋아보였지만, 잭은 톰의 손이 시리얼을 부어주려 프레임에 들어오자 자신이 하겠다고 한다. 그 후 톰이 우유를 넘겨주는 것은 잭의 프레임에서 나오지 않는다. 잭이 자신의 영토, 프레임 내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교류를 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기본 전제이다.
가게에 간 톰 역시 그렇다. 작품이 진행되면 톰은 조이라는 게 밝혀진다. 조이는 곧 폭력을 사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프레임을 내어주는 것은 정당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톰이 처음 가게에 들어설 때, 감독은 톰과 함께 가게에 들어가는 방식이 아닌, 가게 안에서 들어오는 톰을 보여준다. 전자는 톰이 주체지만, 후자는 톰이 샷의 객체로서 들어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처음 톰이 가게에 들어올 때 샷의 주체는 두 남자이다. 그러나 톰이 얘기에 흥미를 가지고 물어보기 시작하면서 다시 단독샷으로 들어간다. 샷의 주체가 톰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의 컷 구성은 권력싸움과도 긴밀하게 연결 되어있다.
이어지는 잭의 야구씬도 마찬가지다. 잭의 단독샷 이후 야구장의 풀샷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잭의 클로즈업이 들어간다. 이 와중에 잭과 다른 팀원들이 교류하는 듯한 어떤 암시도 들어가지 않는다. 잭 역시 단절된 인물인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의 성공(공을 잡은 것)에도 마땅히 다른 인물이 달려와서 칭찬해준다던지 하지 않는다. 다만 풀샷으로 걸어 들어갈 때에만 반응을 할 뿐이다. 잭은 이 프레임의 객체이기 때문이다. 이후 이어지는 대화씬에서 O.S. 컷이 쓰이는데 매우 위협적인 느낌을 준다. 잭의 등 뒤에 적대적 인물이 서있다는 사실과 잭의 개인적 영역에 그가 침범했단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내내 O.S는 유지되다 바비가 나가게 되면 다시 단독샷으로 넘어온다. 물론 잭 자신의 안정감이 없다는 것을 사물함 안쪽에 앉는 걸로 표현한다.
이 영화의 재밌는 부분은 아이러니가 잘 살아있다는 점이다. 처음 롱테이크로 두 남자의 폭력성이 드러나고 아이가 나왔을 때 총을 꺼낸 남자와 이어지는 것은 사라의 모습이다. 비명을 지르는 사라의 모습에서 관객은 “얘한테 뭔가 일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하고 추측하겠지만 의외로 이 영화의 마지막까지 폭력에 제대로 노출되지 않는 가족은 사라가 유일하다. 또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네 가족이 매우 화목하게 나오는 장면이 이런 폭력 뒤에 붙는 장면이라는 것도 아이러니이다. 이후에도 네 가족이 같이 나오는 장면은 톰이 다치고 난 후 병원에서 나오는 장면인 것도 역시 아이러니다. 이런 아이러니가 잘 살아있는 장면이 바비의 차와 두 남자의 차가 충돌할 뻔한 장면인데, 그들이 각각 아버지와 아들의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후 식당에 들어간 두 남자와 톰의 싸움이 벌어지는 장면 역시 극적인 아이러니가 들어있다. 폭력의 가해자였던 두 사람이 피해자로 전환되고 그 와중에 진짜 폭력의 가해자였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씬의 컷들과 다분히 권력싸움과 연관 있는데, 두 남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톰의 단독샷은 없다가 두 남자와 시비가 붙기 시작하면서 단독샷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주체가 식당 사람들이었다가 톰으로 넘어오는 것을 컷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도 O.S는 여자 점원을 잡은 순간 사용된다. 위협적인 영역침범을 암시한다. 이후 이어지는 액션을 보면 이 영화가 폭력을 담는 방식이 의외로 확고함을 알 수 있다. 어떤 기교를 가하지 않고 그 액션을 그대로 보여준 후 가해자, 혹은 피해자의 모습을 비춘다. 그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건 식탁 밑 총을 주우는 장면에서 카메라의 흔들림을 그대로 실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고, 피해자-가해자를 비추는 것은 칼로 톰의 발을 찌른 후 톰의 반응과 남자의 표정, 그리고 톰의 격발과 남자의 죽음-톰의 표정과 두 남자의 죽은 모습으로 이어지는 편집에서 알 수 있다.
이후 카포티가 등장한 후에도 여전히 O.S.는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단독샷의 범위가 넓어지는 편인데 톰-에디/카포티 일당이란 느낌의 샷들도 구성되기 때문이다. 외집단이 있으면 내집단이 단단해지는 방식을 컷으로 승화했다. 집에서 보안관과 함께 얘기하다가 증인보호프로그램 얘기에도 세 명의 단독샷에서 에디가 톰과 투 샷으로 나타나는 것도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카포티의 차를 잡는 장면이 라이트를 잡으면서 시작되는데 이는 외눈이란 이미지로 카포티를 상징함과 동시에 톰을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의 이미지를 준다. 이 이미지는 나중에 사라와 에디가 신발을 사러 갔을 때 카포티의 차가 주차되는 장면을 헤드라이트를 찍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것에도 이어진다.
톰이 홀로 집에서 가게로 가는 장면도 흥미로운 편집인데, 집에서는 뻔히 스톨이란 글씨를 보이게 하고 디졸브로 가게로 넘어간다. 가게에서는 톰이 다시 조이가 된 장소인데 바로 그 장소를 디졸브를 통해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느끼게 하는게 조이의 부활이 오랜 시간 끝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한다(물론 결말까지 알았을 때의 감상이지만). 카포티의 차가 움직인 것을 본 톰이 집에 도착한 후 네 가족이 같은 샷에 등장하는 장면도 흥미로운데 사라는 에디 쪽 계단에, 잭은 톰 쪽 식당에 있고, 이것은 남성들이 이어받는 폭력성의 은유로 보인다.
이후 영화의 컷 구성은 비슷한 방식으로 된다. 짚고 넘어갈 만한 장면이라면 카포티와 톰의 싸움에서 에디가 사라를 데리고 방에 들어간 이후에도 마치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는 듯 창문을 건 컷이 또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도 인물의 시점과는 상관없이 폭력-피해자, 가해자 식의 편집이 이어진다. 톰이 쓰러진 후 바로 운전수의 컷이 붙는데, 다음 컷에서 카포티는 그를 보고 있지 않다. 그 후에 다른 남자도 보지 않고 바로 톰에게 가는데 이번엔 그 남자의 컷이 붙는다. 이런 방식으로 보면 저 창문 너머 보고 있는 사람을 관객이라고 상정하고 의도하지 않았을까.
병원에 입원한 톰과 에디의 대화는 폭력의 이중성을 말한다. 사실 이미 도둑들을 죽인 톰이 영웅화된 것에서 이중성을 드러내긴 하지만 이 대화는 좀 더 직접적이다. 톰은 “내가 한 게 아냐, 조이가 한 거지.”라는 대사를 하는데 이는 사실 미국과 닮아있다. 세상의 경찰을 자처하며 전쟁을 일으키지만 거기에는 결국 죽음과 의혹만 남아있는 그들의 국가를 그대로 톰이란 인물로 투영한 것이다.
폭력의 의미와 현대적 의미를 짚은 크로넨버그는 이번에 성과 폭력을 연결짓는다. 처음에 에디와 톰의 섹스가 문화적인 지점에서 발생한 성의 판타지를 구현했다면 이번에 나오는 계단에서의 섹스는 원시적인 폭력, 소유욕과 결합된 성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둘 다 억눌렸던 감정을 폭발하는 감정을 정화하는 섹스이긴 하지만, 실상 출발과 그 과정은 여성에게는 치욕스런 폭력적 힘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첫 번째 사건으로 데려간다. 이건 신화적인 위치이긴 하나 인류 최초의 살인을 일으킨 형제, 카인과 아벨에 리치와 톰을 대입시킨다. 물론 그들에겐 그만한 신적 존재를 주진 않지만 이전에 부여했던 자기보호와 소유하려는 욕망을 넣어 두 사람이 서로를 적대시할 기회를 충분히 준다. 이 영화에선 결국 톰, 아벨이 이긴다. 신에게 사랑받던 존재가 이겼다. 그리고 톰은 다시 호수 가에서 손을 씻는다. 여기서 그가 이기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이전에 속죄를 했고, 또 다시 속죄를 하고 있다. 사실 작품을 돌이켜보면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물론 이전의 조이가 어땠는지 몰라도 톰 스톨은 결국 가족의 가장으로서 원시시대의 벌이던 폭력을 부린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집으로 왔을 때 누구도 그를 원망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채 그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는 그저 폭력이란 도구를 사용한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러한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합당하다. 한 이야기 내에서 크로넨버그는 원류적인 폭력부터 현대사회의 폭력을 그린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스턴 프라미스>의 정서를 더 사랑하는 편이지만, 이 작품이 내포하는 의미는 굉장하다고 다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