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철학의 바이블
<매트릭스>는 보는 이에 따라 액션 영화의 지평을 새로 연 블록버스터에 그칠 수도 있다. 물론 매트릭스가 불릿타임 사용이라던가 세기말적 세계관을 다시 한 번 정립한 것도, 어느 정도는 블록버스터 영화에 영향을 끼친 것은 맞다. 그러나 <매트릭스>가 그저 블록버스터에서 머무르지 않고 걸작이란 말을 듣는 것은 그것이 지닌 온갖 코드들 때문이다. 그 염세적인 세계관에 사이버펑크를, 그리고 종교와 철학적 상징을 가미함으로써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를 구축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보면 이 영화는 사랑의 위대함이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좀 더 영화를 깊게 인식하고 해석해본다면 이 영화의 화두는 다음과 같다. “To be or not to be.” 우리나라에선 대체로 ‘죽느냐 사느냐’로 해석되는 이 문구는 실은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존재’의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나’이다. 그러나 그냥 내가 아니라 나와 타인을 경계선 짓는 ‘자아’를 뜻한다. 즉 ‘자아가 존재하느냐 마느냐’가 이 영화의 화두이다. 그리고 영화가 결론적으로 제시하는 주제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나는 곧 세상이 된다.’, ‘진짜 나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다소 관념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천천히 되짚어보면 이 영화의 알레고리가 사실상 철학적 사유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오프닝 시퀀스는 트리니티가 매트릭스 안에서 네오를 추적하는 장면이다. 그러다 경찰과 요원들에게 쫓겨서 도망치는 장면이다. 이 6분 남짓한 숏들로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첫째로 매트릭스의 시스템에 관한 것, 그리고 매트릭스에 벗어난 인간들에 관한 것이다. 두 요소 다 후에 더 많은 정보가 드러나게 되므로 그때 다시 한 번 짚어보자.
주인공 네오는 처음에 토머스 앤더슨이라는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그는 해커로서 네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이름이 있다는 것에서 그는 자신의 자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토머스 앤더슨’이란 사회적인 자아에서 ‘네오’라는, 본인이 원하는 자아를 끄집어낸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사회적 자아를 지키며 매트릭스 시스템 안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에 반해 그는 네오라는 본연에 가까운 자아로 시스템에 대항하고 있다. 앞 장면에서 등장했던 저항군들 역시 후자에 속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도 시스템 내의 이름이 아닌 상징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진짜 자아를 드러내고 있다. 이름이란 개개인의 특성이자 개개인을 구분하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이름 역시 자아를 가진 이들의 산물인 셈이다.
이후 클럽에서 트리니티를 만나는 장면에선 중요한 대사가 나온다. “그가 날 찾았을 때, 그는 내가 찾아낸 건 자기가 아니라 해답이랬어. 우릴 움직이는 건 질문이지.” “해답은 어딘가에 있어. 그것은 널 찾고 있고, 널 찾을 거야. 네가 원한다면.” 이 두 대사는 자아를 움직이는 힘과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끊임없는 질문으로 사유를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삶의 이유는, 타인과 나는 등의 질문이 인간의 생각을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해답이 존재한다. 각 질문마다의 해답이 아닌, 단 하나의 해답이다. 이 해답은 곧 사유하는 사람의 염원에 단서를 던지며 마침내 자신에게 도달하게 한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고뇌를 멸한다. 이것은 사실상 동양의 ‘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 도는 과연 무엇인가 하면 물아일체, 나의 자아의 상실이자 모든 물체와의 합일을 의미한다. 즉 도라는 단어가 사용되진 않았지만, 결국 이 대사들이 의미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지칭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는 힘(해답, 도 등)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찾기를 원하면 언젠가 발견된다.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이끄는 힘에 의해서.
그 다음 장면은 회사에 출근한 네오가 요원들에게 잡히는 부분이다. 여기서 네오는 자신의 멘토인 모피어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모피어스는 네오가 도주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제시해준다. 네오도 처음엔 그의 말을 따라서 간신히 도망을 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고층 빌딩의 높이, 즉 위험을 인지하는 순간 모피어스의 조언에도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다. 이것은 자신의 자아(이 경우에는 육체)가 위험할 경우 ‘타인’이라는 경계가 뚜렷해진다는 사실이다. 자아가 타인을 진심으로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의 믿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타인이 나의 자아를 이해할 것이란 확신과 타인을 따름으로써 나의 자아가 상실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확고한 믿음 이전에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자아가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과 같이 자아의 상실을 두려워한 네오는 사회의 시스템에 구속되길 택한다.
이후 요원들에게 심문을 당하는 네오는 사회의 시스템에 완전히 종속되길 권유받지만, 거부를 하고는 추적로봇을 몸속에 심게 된다. 바로 다음 컷에 네오는 자신의 집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곧바로 모피어스에게 전화가 온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보고 ‘The one'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자신과 접선할 것을 제안한다.
모피어스의 제안에 따라 접선하기로 한 네오는 또다시 트리니티를 만난다. “나를 믿어.” 믿는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중요한 키워드인 셈이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곧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곳이 매트릭스이기 때문이다. 모피어스는 네오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한다. “자네는 곧 깨어날 거야.” 이 말은 두 개의 자아 중 어떤 것이 진정 그대의 자아인지를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아조차 사라지게 되어 모든 것을 깨우치게 될 것임까지도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또 매트릭스를 이르러 ‘진실을 못 보도록 눈을 가리는 세계’라 한다. 그리고 네오는 진실과 거짓이란 선택을 종용받는다.
매트릭스는 거짓의 세계다. 그러나 이 거짓은 모든 이들에게 통용되는 거짓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아를 가리는 안대와도 같다. 왜냐하면 매트릭스에서 배양되는 인간들은 각자의 회로를 통해 뇌자극을 받는다. 즉 세계는 같아도 받는 자극은 다르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을 각각 통제하는 것과 같다. 이 상황에서 선택의 결과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습게도 자각-완벽한 자아 해방이 아닌 실재를 자각하는 것- 이후에 자아가 가진 나와 타인의 경계, 거기서 발생하는 고독과 불안감으로 인해 통제로의 회귀를 꿈꾸는 경우도 생긴다. 사이퍼가 그런 인물이다. 물론 그것을 꿈꾼다 해도 완벽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자각은 되돌릴 수 있는 형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네오는 꿈에서 벗어나 현실로 오게 된다. 그 과정 역시 ‘나’에 관한 것이다. 그는 거울을 통해 매트릭스를 벗어나게 된다. 거울은 무엇인가. 사물을 비치는 것이다. 내가 보면 내가 보이고, 다른 누군가가 보면 그 사람이 비치는 것이다. 즉 내가 나란 개체를 인식하게 하는 사물인 셈이다. 나, 자아를 인지하기에 이만한 것이 있을까. 그는 그렇게 깨어난다. 모든 인간이 배양당하며 자신의 온전함을 잊었을 때 그는 깨어나 느부갓네살 호에 오르게 된다.
모피어스와 함께 로딩 프로그램에 들어간 네오는 진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모피어스는 오감에 근거한 진짜란 그저 두뇌 신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감이란 것은 개인이 느끼는 감각이다. 내가 느끼는 감각은 결국 두뇌가 판단을 내린다. 물론 두뇌가 나인 것은 맞다. 그러나 두뇌가 ‘나 전체’는 아니다. 두뇌는 나의 극히 일부분이며 때문에 그것이 내리는 오감은 완벽한 진짜라고 할 수 없다. 어디에도 진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도 없기에 가짜도 없다는 것이고.
네오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훈련을 한다. 그리고 모피어스와 대결을 벌인다. 그러나 모피어스에게 이기기엔 역부족이다. 왜 그러한가. 모피어스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가 이곳을 ‘진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는 어떤 곳에도 없다. 모든 것은 그의 머리 속에서 만든 자아의 환상인 셈이다. 우리는 경험이 주는 예상을 통해 미리 예측하고 가능성을 제한해버린다. 지금이 그러한 상황이다. 나는 이만큼만 움직일 수 있다, 이런 곳은 조심해야 한다, 쟤는 저 정도 해도 난 못 한다 등의 말들로 이미 자아의 한계를 결정짓는다. 이것은 생각을 통해 미리 결정짓는 자아가 가진 맹점이다. 격투를 통해 이를 어느 정도 깨달은 네오에게 모피어스는 “마음을 열라”며 점프를 보여주지만, 아직 완전히 생각을 버리지 못한 그는 실제로 상처가 날 정도로 실패를 하고 만다. 믿음이란 단어가 매트릭스에서 키워드인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 믿으면 그 순간 가짜인 공간조차 현실이 된다. 역으로 우리가 가짜라 믿으면 우리는 진짜조차 가짜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게 믿음의 힘이다.
얘기는 잠시 사이퍼에게로 넘어간다. 그는 매트릭스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대원들을 팔아넘길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자아를 자각하나 다시 자아만을 유일하게 인식할 때의 모습이다. 나 자신의 자아를 위해 타인을 배신한다.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이나 자아라는 말에는 언제나 내포되어진 모습이다. 세계의 중심, 나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네오는 오라클을 만나러 가게 된다. 그는 여기서 한 동승을 만난다. 자유자재로 숟가락을 움직이는 동승에게 방법을 묻자 동승은 이렇게 말한다. “There is no spoon.” 그리고 오라클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재능이 있지만, 뭔가를 기다리고 있어. 다음 인생을.” 그리고 그 부엌에는 이 글귀가 붙어있다. 너 자신을 알라. 이 세 가지의 중요한 이야기는 곧 하나로 일맥상통한다. 자신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를 자각하는 것과 다르다. 자아는 곧 나이다. 육이나 생각, 사념 등에 얽매여있는 존재로서의 나를 의미한다. 그럼 여기서의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에 깃든 자신을 의미한다. 도교식으로 말하면 만물에 편재된 나를,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을 지닌 나를 의미한다. 만물에 있는 자신의 발견을 위해선 자아를 말소해야 하는 것이다. 참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세상이 되고 세상의 것을 굽힐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오라클을 만나고 오는 길에 사이퍼의 배신으로 모피어스는 붙잡히게 된다. 여기서 네오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오라클의 말대로 네오 아니면 모피어스, 둘 중 하나는 희생해야 한다. 네오는 여기서 다시 자아를 배반하는 선택을 한다. 모피어스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이다.
선택이란 건 믿음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매트릭스>에선 선택이 계속 강조되어진다. 진실과 거짓의 선택, 나와 너의 선택, 긍정과 부정의 선택. 이 모든 선택이 필연적으로 맞아떨어지면서 세상은 굴러간다. ‘나의 자각’이라는 소재를 택한 영화이기에 이런 필연적인 세상을 그릴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결국 나에게서 시작하기에. 모든 선택이 이 세상의 움직임을 가하고 그런 움직임 속에서 모든 것은 그렇게 굴러가게끔 되어있기 때문에.
이 선택을 통해 네오는 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난다. 자신 아니면 모피어스의 희생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자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네오에게 동요하지 않는 평정심을 주었고, 평정심이 매트릭스에 의심을 품지 않을 확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원과도 약간은 맞설 수 있고 총알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모피어스가 말하길, “네가 준비가 돼있다면 총알을 피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총알을 피할 수밖에 없고, 그것도 완벽히 피하지 못하는 그는 아직 완벽하게 자아를 버리지는 못 한 것이다. 네오가 정말 ‘그’로 거듭나기 위해선 자아를 저버려야만 한다.
어쨌든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를 보내고 그는 요원과 맞붙게 된다. 물론 막상막하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이것 역시 그의 자아가 만든 환상일 뿐이지만)에 부딪혀 도망을 친다. 하지만 전화를 찾자마자 총을 맞고 쓰러지는 네오. 죽어가는 네오에게 키스하는 트리니티와 부활하는 네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판타지가 아니냐, 결국 사랑의 위대함이냐 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과 육을 동일화했을 때의 이야기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총알을 맞은 것은 그의 육이 아니다. 심장이 멈춘다는 것은 그의 의식이 만든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정신이 죽는 찰나의 순간에, 이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깨닫는다면 과연 부활이 불가능한 일일 것인가? 네오는 그와 함께 요동치는 세상을 느끼고 보여준다. 이제 자아를 잊은 네오를 보며 왜 ‘그’를 messiah, chosen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The one 이란 단어를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1이란 무엇인가. 대체로 유일하고 으뜸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버림으로써 세상에 깃든 나를 인식한다면, 그것은 세상과 타인과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직 ‘나’라는 유일한 것만 남게 된다. 결국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움직이는 것이다. 그가 하고자 하면 세상 속의 나가 대답을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를 버린다는 것의 참의미이다.
이렇게 <매트릭스>는 한 인물이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이자 그 자신의 진짜 나를 발견하는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테마 자체는 굉장히 개인적이고 예술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대중적인 영웅의 이야기에 절묘하게 스며들게 하여서 그만큼 블록버스터로서도 뛰어난 스토리라인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이 테마를 풀어나가는 데 그저 한 종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다문화의 종교와 사상들을 적절하게 배치시켜서 여러 가지 해석과 방법을 유추시킬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진짜 나’라는 것이 주제로서는 매우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참 나를 알고 발견하는 사람 자체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그저 재밌는 시나리오를 넘어 철학적 테마를 작품에 관통시켜서 영화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표본으로 아주 우수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