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미국과 노동자의 은유

by sothaul

나온지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이 영화가 유효할 수 있는 건 표면적인 내용보다 인물들의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테크닉적으로도 흥미롭다. 누가 스티븐 스필버그 아니랄까봐, 톰 행크스 아니랄까봐 “공항에 갇혀버린 남자”라는 스토리를 흥미롭게, 그럴싸하게 풀어낸다. 특히 공항에 잔류하게 된 나보스키가 처음 둘러보는 공항을 원형 무빙을 통해 신천지로 묘사하는 것 자체가 나보스키가 느낄 신기하면서도 복잡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전이시킨다.

영화가 주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재미도 좋은 편이다. 마치 개척자처럼 공항 곳곳을 누비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나보스키의 일상이나 그 주변인물들과의 관계, 아멜리아와의 미묘한 로맨스 등 끊임없이 흥미요소를 유발한다. 덤으로 공항의 공간성도 좋고.

그러나 이 영화에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외국인-내국인으로 설정되어 노동자-엘리트로 은유되는 두 집단이다. 나보스키가 잔류하는 공항 터미널에는 다양한 가게들이 있다. 또한 공항 직원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보스키를 중심으로 응집되는 집단은 죄다 외국인이고 그들은 노동자 계층이다. 그들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집단의 가장 원초적인 업무(청소, 운반 등)을 맡고 있다.


반면 나보스키의 반동인물이라 할 수 있는 프랭크 딕슨은 백인 엘리트 계층이다. 그는 나보스키 때문에 피해를 입고 싶지 않아서 그를 공항에서 쫓아낼 마음만 가진다. 이게 영화 <터미널>의 특이한 점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백인 엘리트라는 이미지를 아주 악독한 인물로 승화한다.




나보스키가 처음 생계수단으로 쓰는 것은 카트 수거이다. 그것은 ‘있는 건 시간’이라는 본인의 이점을 극대화한다. 이것을 본 딕슨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카트 수거 직원을 만든다. 그럼에도 나보스키는 자신의 ‘능력’으로 목수일을 하게 되고 딕슨의 일을 방해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 마침내 공항을 나가게 되는 나보스키와 공항 측의 대립은 외국인 노동자-백인 엘리트의 권력으로 상징된다.


꽤 그럴싸하게 ‘미국의 이면’을 그리려는 영화이지만 우습게도 자승자박에 빠지게 되는 건 마지막 딕슨의 표정이다. 공항을 나와 뉴욕으로 가는 나보스키의 뒷모습을 보며 딕슨은 그저 미소를 짓고는 다시 일을 시작한다. 이 모습에서 딕슨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면 참 다행이겠지만 시종일관 나보스키를 방해하던 그의 모습과는 지나치게 다르다. 그 미소의 의미를 나는 이렇게 보았다.

미국의 위악.

즉 실제로 미국은 그렇게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필요악인 것이다. 마치 나보스키가 있음으로서 한 인간의 승진길이 위험할 수 있는 것처럼. 때문에 그 걸림돌(나보스키)이 사라지기만 하면 미국(딕슨) 역시 다시금 선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영화는 자신이 취해온 태도로 얻은 특이성을 잃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탄압하는 미국 권력의 모습인 영화의 중심적인 메타포가 무너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딕슨의 ‘미소’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영화적으로 봤을 때 딕슨이 거기서 더 집요하게 나보스키를 방해했더라면 그것은 매우 냉혹한 현실의 반영이 될 것이고 영화내내 보여주었던 유쾌한 에너지의 상실로 이어졌을 것이다. 딕슨의 캐릭터, 혹은 메타포와 상관없이 사실 딕슨 역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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