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 타임

프레임을 통해 보는 인생

by sothaul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사실 “월드”라는 꿈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감독은 여러 편의 영화에 숨겨놓은 명사, 공통적인 사건을 집어넣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플레이 타임>이라는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려 했던 자크 타티의 야심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시작부터 넓은 공간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수많은 인물의 등장과 퇴장을 여과없이 롱테이크로 그 모든 움직임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윌로씨”라는 걸출한 캐릭터를 만든 자크 타티는 왜 이 영화의 대부분은 도시와 일순간 지나가는 사람들을 포착하는 데 사용한 걸까.


질문이 정당한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과연 여기서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로 지나가는 것뿐일까? 자크 타티가 의도한 건 무엇일까?


유리창을 통해 에펠탑이 반사되는 숏을 통해 여기가 파리라는 것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이 도시는 파리에 비해 터무니없이 좁기도 하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어디선가 다시 마주친다. 대도시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하나의 세포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버스를 타는 윌로씨 뒤편으로 의자에 앉아 춤을 추듯 움직이는 남자의 발이 보일 때, 이 영화는 여기 살고 있는 모두가 주인공인, 살아 숨 쉬는 도시를 그려내려고 했던 의도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파리를 배경으로 하면서 굳이 거대한 세트를 짓고 그 많은 배우들을 기용하여 자크 타티가 보는 파리는 새롭게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 영화에서 그런 미학을 어떻게 드러내려고 한 걸까. 깔끔하게 주조된 세트를 통해? 아니면 일상적인 연기를 숙달한 배우들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미학은 다름 아닌 프레이밍이다. 즉 우리가 보는 프레임 안으로 끊임없이 다른 프레임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다층적인 이미지와 복합적인 사회의 모습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다.

첫 장면, 하늘이 지나간 후에 나오는 건물 내의 모습은 과도하게 커 보인다. 실제로 있는 인물에 집중하지 않은 넓은 풀샷에 칸막이 사이로 드나드는 인물들과 유리창 너머 하늘 때문에 이 공간은 관객에 머릿속에서 더 크게 확장된다. 별다른 것 없는 롱테이크 장면이지만 이 장면만으로도 <플레이 타임> 전반에 적용되는 미학을 알아차리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의 대부분이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무언가를 관통하는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대부분은 “유리”인데, 이 유리를 통해서 이 영화의 세계는 계속 확장된다. 그만큼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늘어나고, 그래서 한편으로 과하게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눈앞에 들이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영화에서 그 유리를 통한 이중 프레이밍이 가장 잘 들어나는 부분은 물론 윌로씨가 친구를 만나 아파트에 들어간 씬이다. 여기서 한 번도 카메라는 아파트 내부로 들어가지 않고 오로지 대형 유리를 통해서만 그들의 모습을 포착한다. 옆집엔 윌로씨를 찾던 직원이 들어오고 그들은 벽 하나를 두고 서로 만나지 못한다.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장면이지만, 실제로 소통되지 않는 공간이 유리창을 통해서 교류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때 이 이중 프레임이 지적인 확장을 가져다준다. 거기다 이 장면은 판매장과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아파트 전체 풀샷을 잡을 때 대화조차 들리지 않는 진열장의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물들에게 또 다른 포지션을 부여하는데 그건 바로 (TV를 보는) 관객이라는 입장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보고 있는 TV처럼 우리가 들여다보는 유리창 역시 네모나다. TV 속 일이 그들과 별개여서 그들이 몰입할 수 있듯 유리창 속 윌로씨의 모습도 우리와 별개이기에 우리는 몰입할 수 있다. 여기서 <플레이 타임>이라는 제목이 함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세계의 외부인은 관객만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윌로씨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바바라 역시 미국에서 여행 온 미국인이다. 사실 이 파리에는 많은 관광객이 드나들고 수많은 언어의 중첩이 이뤄진다. 따지고 보면 이들도 당장 이 도시와의 큰 교류는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도시의 활력을 가져다준다. 영화에서도 바바라와 윌로씨가 만나는 레스토랑에서 말할 수 없는 사고들이 즐비하면서 동시에 즐거움으로 가득한 파티가 벌어진다. 엄밀히 말해 그들도 관객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도시를 상영시간까지만 머물 수 있는 관객처럼, 그들이 떠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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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레스토랑 씬은 분명 자크 타티가 보는 현실의 은유일 것이다. 아직 완벽하게 자리 잡지 못한 우리 사회가 수많은 단점을 드러낼 때, 심지어 그것이 “먹다”와 관련된 기본적인 부분에서마저, 그것을 깨부술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도. 그리고 그것은 윌로씨, 자신이 연기한 인물, 아마도 영화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윌로씨가 오면서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은 “유리문”이 거짓말처럼 부서지는 것이다. 예컨대 세계를 확장하되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프레임이 부서진 것이다. 이제 프레임 너머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그 너머로 들어갈 수 있다. 문고리를 잡고 프레임이 있는 척 하긴 하지만 이미 그 벽은 무너졌다. 자유롭게 우리는 그 너머로 편입할 수 있다. 윌로씨의 등장으로 레스토랑은 더 악화되지만 그곳은 축제의 장이 된다. 외부인과 내부인 할 거 없이 그들은 사회 속에 아우러진다. 심지어 몸을 못 가누는 취객도, 유니폼이 넝마조각처럼 되어버린 노동자마저.

마지막으로 가장 아름다우면서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엔딩 씬은 이 영화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봐온 수많은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이 태도의 변환으로 얼마나 대단한 것이 될 수 있는지 지적하고 있다. 여전히 여기서도 프레이밍을 통해 기막힌 전환을 보여준다. 관광객들이 타고 있는 버스가 비친 창문이 청소를 위해 뒤집힐 때, 거기서 곁들여지는 환호성은 타자가 보는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전해준다. 그리고 이 관점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된다. 우리가 이 스크린, 프레임 너머의 것을 보면서 여행자와 같은 마음으로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세상을 그렇게 본다면, 잠시 들려다 떠나는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 세상 역시 지고의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았을까. 나는 자크 타티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타티빌 내의 모든 인물에게 공을 들이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분신과도 같은 윌로씨의 비중까지 줄이면서. 비록 우리 세상이 미술적으로 잘 공들여지거나 모두에게 동일한 비중으로 삶이 전개되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세상을 이루는 동등한 요소임을 기억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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