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thaul Feb 25. 2019

사바하

과하게 친절한 친구는 불편하다

박웅재 목사는 대한민국의 사이비 종교를 연구하고 그것을 공표하는 연구소를 운영한다. 그는 사슴이 그려진 불교의 새로운 종파를 발견, 이 종파를 집요하게 조사한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이금화는 쌍둥이 동생이 있다. 금화는 동생을 ‘귀신’이라 부르고, 조부모는 그를 가둬 키운다. 박 목사가 조사하는 신흥 종교의 일원 정나한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딘가로 향한다.


능력 있는, 혹은 좋은 감독이라 해도 그 사람의 작품과는 맞지 않을 때가 있다. 내겐 장재현 감독이 그렇다. 그의 전설적인 단편 <12번째 구마사제>를 아직 못 봤지만, 그걸 장편화한 <검은 사제들>은 대중들의 호응과 별개로 정말 볼품없는 영화라고 느꼈다.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사바하>는 그래도 맞지 않을까 했지만, 희망사항이었다.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는 거의 물아일체 수준으로 영화에 빠져들었다. 얕게나마 여러 종교에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 <사바하>의 세계는 흥미를 유발했다. 기독교 목사가 불교의 신흥 종파를 조사한다는 아이러니는 물론이고, 이것을 교리나 종교의 기본 토대와 접목시켜 풀어내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한 인물이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까지 <사바하>는 관객들에게 거의 모든 걸 보여줬다. 관객은 박 목사의 입장에서 신흥 종교를 만났고, 나한의 입장에서 뭔가가 시작될 것임을 목격했다. 영화를 자주 보는 관객이라면, 이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감하거나 추리할 것이다.


그런데 <사바하>는 거기에 의미심장해 보이는 설정들을 덧붙이며 다시 설명을 시작한다.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기다리는 관객이라면 서서히 지쳐갈 것이다. 끝없이 암시로만 영화를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영화의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이어진다. <검은 사제들>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했던 걸 <사바하>에서 똑같이 만난 셈이다.


개인적으로 <사바하>를 보면서 의도적으로 문제를 피해 간다고 느꼈다. 사이비 종교를 여러 차례 조사했던 박 목사가 지나치게 이 종교에 집착하는 것도 다소 의뭉스럽고, 그가 발견한 자료를 연결해가는 과정이 너무 늦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말미에 와서는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장재현 감독과 나의 논리 구조가 완전히 다른 건가?’ 그 정도로 이 영화의 전개가 뒤늦고, 지나치게 친절하며, 그렇기에 반복적이라고 느꼈으니까.


그 문제를 건너뛰더라도, <사바하>는 소재에 비해 인상적이지 않다. 종교란 세계를 보는 하나의 시선을 보는 것인데, 그런 종교를 (여러 종파를 포함한) 두 가지나 가져왔지만 설정의 디테일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박 목사는 이미 종교에 냉소적인 존재이며, 나한은 영화가 ‘사이비’라고 규정짓어버린 신흥 종교의 인물이다. 몇몇 일화들로 이들이 가진 종교적 시각을 드러내지만, 파편적이라 영화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다.


결국 종교를 중심 소재로 바짝 끌어 쓴 것에 비해 <사바하>가 제시하는 종교적 세계관, 시각은 빈약해지고 만다. 특히 나한이 후반부 보여주는 믿음의 흔들림은 그의 행적에 비하면 가벼워서 편리하게 전개를 뒤집기 위한 방법으로만 느껴졌다. 종교를 '믿음'으로 치환해 여러 얘기를 제시한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은)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면, <사바하>의 시각은 더욱더 아쉽다. 


<사바하>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교를 그리는 영상미도 인상적이고, ‘중2병’적인 것을 종교로 승화해 현실적으로 풀어낸 아이디어도 괜찮다. 하지만 모든 걸 보여주면서 "모든 걸 본 관객"의 입장을 배제한 채 너무 친절하려고 노력한 게 아닌가 싶다. 원래 너무 상냥하면 부담스럽다고 하지 않은가. <사바하>가 딱 그런 모양새다.

매거진의 이전글 벨벳 버즈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