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하게 친절한 친구는 불편하다
박웅재 목사는 대한민국의 사이비 종교를 연구하고 그것을 공표하는 연구소를 운영한다. 그는 사슴이 그려진 불교의 새로운 종파를 발견, 이 종파를 집요하게 조사한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이금화는 쌍둥이 동생이 있다. 금화는 동생을 ‘귀신’이라 부르고, 조부모는 그를 가둬 키운다. 박 목사가 조사하는 신흥 종교의 일원 정나한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딘가로 향한다.
능력 있는, 혹은 좋은 감독이라 해도 그 사람의 작품과는 맞지 않을 때가 있다. 내겐 장재현 감독이 그렇다. 그의 전설적인 단편 <12번째 구마사제>를 아직 못 봤지만, 그걸 장편화한 <검은 사제들>은 대중들의 호응과 별개로 정말 볼품없는 영화라고 느꼈다.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사바하>는 그래도 맞지 않을까 했지만, 희망사항이었다.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는 거의 물아일체 수준으로 영화에 빠져들었다. 얕게나마 여러 종교에 관심이 있는 입장에서 <사바하>의 세계는 흥미를 유발했다. 기독교 목사가 불교의 신흥 종파를 조사한다는 아이러니는 물론이고, 이것을 교리나 종교의 기본 토대와 접목시켜 풀어내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한 인물이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까지 <사바하>는 관객들에게 거의 모든 걸 보여줬다. 관객은 박 목사의 입장에서 신흥 종교를 만났고, 나한의 입장에서 뭔가가 시작될 것임을 목격했다. 영화를 자주 보는 관객이라면, 이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직감하거나 추리할 것이다.
그런데 <사바하>는 거기에 의미심장해 보이는 설정들을 덧붙이며 다시 설명을 시작한다.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기다리는 관객이라면 서서히 지쳐갈 것이다. 끝없이 암시로만 영화를 끌고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영화의 클라이맥스 직전까지 이어진다. <검은 사제들>의 문제점이라고 생각했던 걸 <사바하>에서 똑같이 만난 셈이다.
개인적으로 <사바하>를 보면서 의도적으로 문제를 피해 간다고 느꼈다. 사이비 종교를 여러 차례 조사했던 박 목사가 지나치게 이 종교에 집착하는 것도 다소 의뭉스럽고, 그가 발견한 자료를 연결해가는 과정이 너무 늦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말미에 와서는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장재현 감독과 나의 논리 구조가 완전히 다른 건가?’ 그 정도로 이 영화의 전개가 뒤늦고, 지나치게 친절하며, 그렇기에 반복적이라고 느꼈으니까.
그 문제를 건너뛰더라도, <사바하>는 소재에 비해 인상적이지 않다. 종교란 세계를 보는 하나의 시선을 보는 것인데, 그런 종교를 (여러 종파를 포함한) 두 가지나 가져왔지만 설정의 디테일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박 목사는 이미 종교에 냉소적인 존재이며, 나한은 영화가 ‘사이비’라고 규정짓어버린 신흥 종교의 인물이다. 몇몇 일화들로 이들이 가진 종교적 시각을 드러내지만, 파편적이라 영화 전체를 지배하지 못한다.
결국 종교를 중심 소재로 바짝 끌어 쓴 것에 비해 <사바하>가 제시하는 종교적 세계관, 시각은 빈약해지고 만다. 특히 나한이 후반부 보여주는 믿음의 흔들림은 그의 행적에 비하면 가벼워서 편리하게 전개를 뒤집기 위한 방법으로만 느껴졌다. 종교를 '믿음'으로 치환해 여러 얘기를 제시한 (<라이프 오브 파이> 같은) 다른 영화들을 떠올리면, <사바하>의 시각은 더욱더 아쉽다.
<사바하>는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불교를 그리는 영상미도 인상적이고, ‘중2병’적인 것을 종교로 승화해 현실적으로 풀어낸 아이디어도 괜찮다. 하지만 모든 걸 보여주면서 "모든 걸 본 관객"의 입장을 배제한 채 너무 친절하려고 노력한 게 아닌가 싶다. 원래 너무 상냥하면 부담스럽다고 하지 않은가. <사바하>가 딱 그런 모양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