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출근
나의 한 시간 남짓한 출근길의 마지막 코스는 어린이보호구역이다. 며칠 전 어린이보호구역 신호등 횡단보도 빨간불에 맞춰 정차를 하였다. 횡단보도 앞 슈퍼에서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아이스크림을 한입씩 물고 나오다 파란불을 보자 서로 마주 보고 웃고는 급히 뛰어간다. 8시 44분, 이 시간이면 학교 늦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둘의 차림새를 살펴보니 우리 딸 어릴 때와 비슷하다. 헐렁한 박스티셔츠를 통이 넉넉한 바지 위로 길게 꺼내 입은 편한 옷차림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뛰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곳에 처음 어린이보호구역 신호등이 생겼을 때 직장분들이 알려준 대로 이 길을 피해 골목길로 출근해 본 적이 있다. 외곽도로와 고속도로를 쉼 없이 한 시간을 달려와 도착 직전까지 마지막 골목길로 정신없이 출근하다 보니 정말 한바탕 레이싱을 한 기분이었다. 골목길로 가면 3분 정도 빨리 도착한다. 하지만 몇 번 시도한 끝에 나는 어린이보호구역 시속 30km의 여유를 즐기며 출근하고 있다.
차로 천천히 움직이며 관찰하는 동네의 모습이 북적이진 않지만 사람 사는 내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좋다. 잘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일찍 문을 열고 영업이 한창인 슈퍼, 장사가 잘되지 않을 것 같은 빵집, 가격이 너무 비싸게 고지된 미용실, 가끔씩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들, 유치원 등원을 시키는 엄마 또는 할머니의 모습이 매일 똑같을 것 같지만 항상 다르다.
그리고 이 길의 묘미는 가로수에도 숨겨져 있다. 흔치 않은 살구나무 가로수길이다. 직장 첫 출근은 겨울이라 가로수 길에 별로 감흥이 없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가로수길은 꽃 잔치가 열렸다. 첫해 예쁜 꽃들을 보고 벚꽃인 줄 알고 신나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주변 누구도 살구나무라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로수에는 여전히 나만 관심이 많다. 여름이 되어 가로수에 어여쁜 살구가 주렁주렁 달린 걸 보고서야 살구나무 가로수길인 걸 알았고 이제는 매년 벚꽃보다 살구꽃을 더 기다린다. 살구꽃이 피면 마치 신데렐라 호박마차같이 오래된 동네가 한순간 마법가루를 뿌린 것처럼 화사하게 변신한다.
따스한 봄날엔 매일 지나다니며 살구꽃을 보면 항상 기분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그곳을 지나는 나의 기분에 따라 동네가 화사해 보이기도 낡아 보이기도 한다. 안전해야 할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차가 어떤 날은 용서 되고, 어떤 날은 황당한 비매너 운전에 몹시 화가 난다. 결국 나의 상태가 바깥 풍경이나 일들에 대한 느낌을 대부분 결정한다. 나에게 어린이보호구역은 아침마다 나의 상태를 가늠해 보는 시간이고 마음을 가다듬는 출근시간의 여유라는 사치를 주는 공간이다.
매일 일상적으로 꼭 지나는 길이나 공간 중에 나의 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마음사치구역’을 지정하면 나쁜 감정을 한주먹 덜어낼 수 있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거나 멈춰 설 수 있는 곳이 ‘마음사치구역’으로 가장 적당하다. 차로 이동하는 출근길에 가장 막히는 구간이 이제는 최상의 ‘마음사치구역’이 될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러 걸어가는 길이나 혼잡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나의 오늘 마음 상태를 점검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