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불량이 심해진 이유
내가 먹고사는 직업은 공무원이다.
물론 말끔한 정장을 입고 세종시에서 일하는 국가공무원은 아니다. 그보다는 권위는 일절 없는 지방공무원이다. 동네에서 등본을 떼려고 방문하는 과거에 동사무소라고 부르는 관공서에서 주로 일했다. 게다가 지역도 작은 소도시라서 최근에는 지리산이 가까운 면에서도 근무했다. 그래도 요즘 같은 세상에 공무원으로 7년 가까이 일을 해오고 있으니, 주변에서는 부러워한다. 그렇다고 나도 공짜로 얻은 자리는 아니다. 대부분의 내 또래의 사람들처럼 취업을 위해서 20대를 다 쏟아부었다. 그리고 30대 초반에서야 취업에 성공했다. IMF라는 국가 환란 이후에는 참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가 돈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더 정확히는 돈을 버는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이다. 과거에는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기업을 목표로 수많은 지원서를 내면, 못해도 중소기업에 입사하는 구조였다, 이제는 입사도 어렵지만, 퇴사는 손바닥 뒤집듯 이뤄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봐온 세대의 선택은 안정성이었다. 그렇게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최고의 직업으로 손꼽자 노량진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노량진은 나에게도 대학교 졸업 기점으로 몇 년을 살았던 제2의 고향이 되어버렸다.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학비로 가족의 지원이 없이는 올라오기도 힘든 곳에서 수천 명이 상주했고, 집이 가까운 수험생은 한두 시간을 통학하며 공부하는 곳이다. 그마저도 여력이 안 되면 집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인터넷 강의와 책을 보면서 독학을 했다. 그렇게 1년에 수십만 명이 지원하는 공무원 열풍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생활했는데, 단순하게 취업준비생이라는 지위가 필요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부류의 학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먹을지 고민을 하며, 친구들과 카페를 가고 게임을 하고 연애하기 바빴다. 하지만 대부분 취업준비생은 한 줄 앞에 강사가 잘 보이는 자리를 맡기 위해서 새벽에 출발해서 학원 자리를 맡고, 자습 공간을 위해서 빈 강의실이나 무료 공부방을 철새처럼 옮겨야 했다.
나도 그러한 철새 중 하나였는데, 그러한 생활 속에서 제일 고민은 역시나 돈이었다. 어떻게든 올라온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할 마음은 하늘을 찔렀지만, 통장 잔액은 항상 모자랐다. 부모님께는 잘 먹고 건강하다고 했지만, 항상 아팠다. 특히나 소화가 안 되어서 좀처럼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는 것이 부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일정 수준의 생활비를 받고 올라오면 고시원이나 학원 수강료, 교재비, 교통비는 줄일 수가 없지만 딱하나 식비는 탄력적이었다. 오죽하면 지금도 노량진의 컵밥이 유명하겠는가. 당시에 천 원짜리 김밥과 주먹밥은 간단하게 식사를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어서 즐겨 먹었는데, 그러다 탈이나 버렸다. 결국, 극심한 위장병에 병원은 가지만, 6천 원짜리 죽을 사 먹을 수 없어서 차라리 굶는 시절을 보내니 한 달 만에 10kg이 빠져 버렸다.
군대에서도 단순히 배가 고픈 것으로 내가 이렇게 서러운 적이 없었는데, 위장병으로 10kg이 빠지고 나면 악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그 후로 더 공부해서야 합격을 했지만, 뱃가죽이 등과 붙었던 시절에 내과 의사 말에 서운했다.
“빨리 좋아지려면 식이요법이 중요합니다. 당분간은 죽을 드세요.”
나는 약을 먹으면서도 밥은 먹지 못했다. 정확히는 한 끼에 6천 원 이상의 돈을 쓸 만큼의 여유가 없어서 너무 배가 고프면 인근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먹었다. 김치도 빼고 밋밋한 된장찌개를 부탁해서 먹는 것이 유일한 나의 식이요법이었다.
‘젊어서 하는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격려는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아픈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심도 없는 말에 나도 한마디 더 붙이자면, ‘젊어서 아프면 늙어서도 더 아프다.’라고 되받아치고 싶다. 그나마 밥벌이하는 직장이 있는 지금도 위가 따끔거리면 악의 없는 처방을 내린 내과 의사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병원이 나의 병을 치료하는 약을 처방도 해주지만, 마음을 후비는 상처도 주는 곳이라는 점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