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맘이 어때서

야옹이를 좋아하는 이유 하나

by 이춘노

나는 캣맘이다. 고양이를 키우지도 않고, 만지지도 못하지만. 차 트렁크에 사료나 고양이 캔을 가지고 다니며 그 녀석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런 게 캣맘의 기본 조건이라면 난 그런 일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녀석들은 야옹이라고 부른다. 혹은 나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지 않는 야옹이를 나비라 애타게 부른다. 신기하게 나비라고 부르면 “야옹~”하고 답을 주는 신기한 생명체들. 그런 야옹이에게 공물을 바치는 모습은 주변에게 다양한 시선과 질문을 받는다.

특히나 고양이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나를 보며 묻는다. 고양이들에게 사랑받는 모습 없이 왜 녀석들에게 밥을 주고 관심을 주냐고. 사실 보통의 경우에는 1미터 안으로 함께 공간을 나누지도 못 했다. 그 근처를 가기 위해서는 캔 정도는 까줘야 30센티 안으로 접근이 가능했다. 그 정도로 녀석들은 날 경계했다. 그만큼 나의 사랑과 애정은 무의미했다.


먹이로 유혹해야만 다가오는 너희들 어느 별에서 왔니?


지구가 혹시 고양이 별은 아닐지? 집에서도 그렇지만, 면사무소에서도 고양이 가족들이 눈에 보인다. 게다가 길을 지나는 곳곳에 녀석들은 내 시선을 강탈한다. 시선을 빼앗긴 30초 동안 폰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서 야옹이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쯤 변명처럼 생각해 본다.


귀엽긴 하지만 그 걸로는 부족한 이유 하나.


단순히 귀엽다는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세상엔 귀여운 것들이 천지다. 아이들도 그렇고, 더 접근하기 쉬운 아담한 인형들로 방을 채울 수 있다. 그런데 저런 도도한 생명체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나 내가 길냥이를 귀여워하는 이유는 험난함 속에서 그 도도함과 귀여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먹이가 없는 도시나 농촌 어느 주택가에서 자신들만의 공간을 갖고, 저만한 생존력을 가진 생명이 또 어디 있을까? 너무나 많이 보이기에 우리는 무심하게 지나치지만, 굶주리고 다친 녀석들은 조용히 사라진다.

기특하다. 도도하지만 마냥 귀엽게만 타박타박 걸어 다니는 야옹이는 그 자체가 사랑스럽다. 그리고 생명체로써 강인한 녀석들이다. 그 자체로 존중할만한 생명이다.


누군가도 나를 저런 야옹이처럼 사랑해주겠지? 그리고 날 위해서 신경을 쓰겠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고양이만 이렇게 챙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 주변에 모든 것들 속에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랑받고 사랑을 나눠주는 관계가 설정되었다.

사실 지구에 사는 우리는 모두 사랑받고 있는 존재들이다. 내가 고양이를 더 신경 쓰는 것은 내가 그 정도는 할 수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넓은 누군가는 나를 고양이처럼 챙기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은 내 그릇은 아직은 캣맘 정도지만, 언젠가는 주변을 더 챙길 수 있는 큰 사람이 된다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캣맘은 끊을 수 없겠다고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