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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추억하는 장소

정동진에서 시계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만나다

by 이춘노

“백학”이라는 음악을 기억하는가?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 테마곡이라고 하면 쉽게 기억할 것이다. 러시아어로 장엄하게 불린 이 노래는 실제로 2차 대전에 죽은 병사들이 학이 되어 날아온다는 슬픈 배경을 가진 노래이다. 이 노래 말고도 잔잔하게 울리는 피아노에 메인 테마곡도 기억한다.

아마 이곳 정동진역에서 들렸던 음악도 그 메인 테마 곡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많이 변해버린 역 승차장이지만, 20년 전에 처음 왔던 그 느낌은 그래도 드라마의 느낌을 제법 남기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났다. 바다와 가까웠던 역과 기차와 벤치.


최근에 지인과 드라마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다. 그리고 정동진 이야기가 나오면서 전성기 시절에 고현정을 기억했다. 정동진역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다가 경찰에 체포되는 모습과 동시에 흘러나온 음악. 주인공의 안타까운 상황과 다르게 그 풍경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얼마나 아름답던지. 쓸쓸한 상황과 풍경과 음악이 짧은 장면임에도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바다가 보이는 역을 꼭 가고 싶었다.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을까? 당시는 SBS가 나오지 않는 지역이라서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봤다. 그만큼 드라마는 어느 의미에서는 충격적이었다. 아마 <여명의 눈동자>와 이어지는 현대사의 슬픈 이면들이 처음 브라운관을 통해서 봤기 때문일까?

물론 어린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나오기 힘들었을 드라마 주제였다. 5.18의 내용도 그랬고, 고현정이 숨어들었던 어촌 마을에 노동자 이야기나 정치 깡패 이야기 등. 당시 표출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드라마로 시청한 20~30대들은 자연스럽게 열광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지.


덕분에 난 정동진역에 있다. 처음도 아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기에 대학교 1학년 입대를 앞두고도 새벽 기차를 타고 왔다. 아마 정동진은 누구에게나 추억을 남긴 곳이다. 몰래 연인과 일출을 보기 위해서 오기도 했고, 가족끼리 새해 다짐을 가지려고 왔던 곳이다. 솔직히 별로 볼 것도 없는 여행지임에도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일출을 기다리면서 사람들은 <모래시계> 테마곡을 듣고 있었다.

확실히 드라마 촬영 당시와도 다르고, 처음 정동진을 왔던 시절과도 그 중간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젠 정동진역이라는 이름 빼고는 모두 바뀐 것 같다. 공원도 생기고, 시계 박물관도 생기고, 음식점도 생겼다. 당시에는 없던 편의점도 있다. 그런데도 어쩐지 아쉽다는 마음이 들어서 한동안 정동진역 주변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모래시계 테마곡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쓸쓸해지는 느낌과 더불어서 과거의 내가 스쳐 갔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시절의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근거 없는 자신감이 동시에 있었고, 스스로 또 누군가에게 수 없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흩어진 약속들을 돌아보려고 다시금 이곳에 앉아 있다.

아마 나도 정동진역처럼 이름 빼고는 모든 것이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나이도 들었고, 외모도 변했고, 함께 하던 사람도 달라지고, 꿈도 변해서 이젠 이름만 남았다. 그런데도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도 같은 것은 있다. 다음에 이 자리에 있을 내가 좀 더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 시계라는 존재는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거니깐. 그렇기에 내가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낼지 생각하게 하는 물건이니까. 난 이곳에서 바다를 보는 것 아닐지. 아무 쓸모없을 것 같은 모래시계를 보면서 먹먹해진 나를 조금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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