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을 생각하며 탈출구를 생각해본다
휴대폰 액정 화면이 반짝이며 진동 벨이 울린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신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전화를 받는 것을 개인적으로 무척 두려워한다. 부득이한 통화를 제외하고는 문자나 메신저를 선호한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노량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도 한계에 다다랐다. 여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다달이 수험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벅차다는 생각이 들 무렵, 고향의 아버지께서 사고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법원직 공무원을 포기해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다. 나의 휴대폰에 울리는 전화 중, 집에서 오는 전화 대부분은 좋지 못한 소식뿐. 어떻게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문구를 세뇌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곧 서른을 맞이하면서 생활비를 위해 구직사이트에서 알바 신청을 하고, 그날 바로 편의점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 보통 저녁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야간 알바를 하면 한 달 수령액 88만 원. 뉴스 헤드라인에서 보던, ‘88만 원 세대’였다. 서울살이 취준생이 본인의 문제와 고향 노부모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결국 취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린 노량진의 취업준비생은 보통 세 가지의 선택을 한다. 첫째는 무조건 공무원에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는 더 다른 길이 없다는 결론을 확정 짓고, 노량진이 제2의 고향이 되는 경우. 둘째로는 돈이 없는 상황에서 짐을 싸고 고향에 내려가는 경우이다. 이 두 가지를 서로 반복하며, 결국엔 합격생과 취준생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지막의 경우가 본인이 준비하던 길을 접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경우이다. 내 경우가 그랬다.
그러던 새해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과 독서라는 취미가 같아서 친하게 지내던 동창이었는데, 서울에 볼일이 있어 잠깐 저녁 식사를 하자는 이야기였다. 비록 주말 없이 일하는 취업준비생이지만, 짬을 내서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친구와 나는 학창 시절 비슷한 꿈을 가진 점에서는 같았지만, 집안 상황은 정반대였다. 독서와 글쓰기라는 같은 취미도 같았다. 게다가 체력 단련으로 시작한 검도를 같은 날 입문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위에 비교가 존재했다. 그래서 나 스스로 의식을 했던 친구. 대학교 진학에도 집안의 상황을 고려해야 했던 나와는 다르게, 호주 여행과 중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이뤄가는 친구가 결혼까지 해서 나를 만나러 왔다. 어떤 의미에서는 피하고 싶은 불편한 자리였다.
‘왜 그랬을까?’
결혼식 초대까지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지 못하고, 다른 친구를 통해서 짧은 영상으로 본 그때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약속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날은 저녁에 친구를 만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다음 날 금요일 오후부터는 주말 휴무로 조금은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목동에 있는 영화관에서 영화도 볼 계획도 세웠다.
그리고 목요일 오후 저녁 조금 이른 시간에 노량진역 육교에서 거의 10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깡마른 체형과 뿔테 안경은 고교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특유의 흘려 쓰는 말투와 배우자와의 통화 속에서 오랜 중국 유학으로 익숙해진 중국어가 함께 길을 걷는 내내 타국에 와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다.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친구의 태도와는 다르게 현실 속 나의 모습은 학창 시절의 부러움과 질투가 소환되어 대화의 맥까지 끊는 침묵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침묵 속 빈 시각은 친구가 최근 중국에서 배우자를 만나 국제결혼을 하게 된 스토리와 태어난 아들에 대한 자랑, 현재 다니고 있는 여행사 이야기로 채웠다. 그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초라함과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해보았다.
‘나도 그 친구처럼.’이라는 만일이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수없이 적어보았다. 물론 나만 보이는 그 질문에는 답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노량진까지 온 친구를 위해서 밥도 사고, 노량진까지 배웅하고, 돌아서서 시계를 보기 위해서 무심코 본 휴대폰 액정에는 세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어머니’였다.
노량진역 앞 육교 위에서 송신 버튼을 누른다. 몇 초의 통화음. 퇴근길 수없이 행인들과 육교 밑으로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 위에서 엄마는 아버지가 입원하셔서 내일 수술을 하신다는 내용을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통화를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저 멀리 보이는 차들과 버스 승차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보다, 9호선을 타고, 동작역에서 환승을 하며 높다란 계단을 촘촘히 걷는다. 그리고 2호선 사당역을 가는 전철을 두 번 보내고서 평소보다 약간 늦게 도착한 편의점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일한다. 그리고 아침 7시 교대를 하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주행 버스를 타고, 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으로 갔다.
혼잡한 병원 입구에서 입원하신 병실까지 다시금 계단을 천천히 한발 한발 올라간다. 5인실 병실에는 수술을 위해서 검사 중이신 아버지와 불안하게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엄마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애써 웃으며 두 분 손을 잡는다. 그렇게 아버지의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마취가 깨고서 엄마가 저녁을 드시는 것을 본 후에 늦은 저녁 서울로 향한다. 나는 생각했다. 하루가 선사한 영화 같던 시간과 나한테 주어진 현실 속에서‘만약이란?’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러한 질문 때문에 아버지가 편찮으신 것 같은 죄책감과 씁쓸한 자존감을 안고 반지하 고시원에서 쪽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