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상경기

제2의 고향 노량진

by 이춘노

나는 20대 이후는 고향에서 살았던 적이 별로 없다. 대학교 4년은 전남 순천에서, 그리고 군 생활은 전북 군산에서 의무경찰로 복무했다. 그 이후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노량진을 지방 소도시에 비할 순 없지만, 생각보단 좁은 공간 있었다. 노량진역을 기준으로 사방 두 블록 사이에 모든 것이 밀집해 있다. 유명 학원을 필두로 공무원 서점, 고시원과 독서실, 밥집, 커피숍 등 그 공간 안에서는 거의 모든 수험공부가 가능했다. 물론 길거리에 길게 늘어진 유명 컵밥 거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국에서도 손꼽히게 성능이 뛰어나서 게임광들이 원정을 온다는 피시방, 값싸고 안주 풍부한 술집도 많아서 서울에서도 돈 적게 들여서 놀기 좋은 곳으로 이름이 났다.


내가 살던 고시원은 옥상에서 노량진 전경이 보일 만큼 높은 지대에 있었다. 지대는 높았지만, 내방은 반지하. 창문을 열면 앞 건물 벽이 보이고, 그 사이로 고양이 한 마리 다니는 풍경만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29만 원 반지하 고시원은 엄지만 한 바퀴벌레가 드문드문 복도를 다니긴 했어도 여름에는 에어컨 빵빵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105호. 나만의 아지트였다.


나는 105호에서 5년을 살았다. 8과목 공부를 위해서 주말에도 학원에 나가 수업을 들었던 열정적인 수험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내 몸 하나 누울 곳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그렇게 고시원에서도 가장 오래 거주했던 장수생은 시험공부를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을 쉬는 날에는 새벽에 조금 걸어 나가면 24시간 운영하는 국숫집과 중국집이 있어서 야식도 먹었다. 그런 나를 응원하기 위해서 친구가 오면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싸고 맛있는 음식을 골라서 먹는 재미를 누렸다. 조금 과욕을 부려, 수산시장에서 회 한 접시를 사서 소주를 마시면, 오지 않는 잠을 청해 볼 수 있었다. 당시에 가족이나 친구들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노량진에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애초에 법원직을 공부하다가 여러 번 낙방하면서 공무원이라는 초반의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공부하지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점점 아픈 곳이 늘어나서 식비를 줄여서 병원을 가야 하는 시기도 있었다.


다만 고향에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은 7개월 고향에 내려가서 시립도서관을 오가며 공부도 했었다. 그렇지만 시골은 인사(人事) 밀도가 높아서 서울의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한마디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한없이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숨기기에는 노량진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래서 또다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 아닌 생활을 위해서 노량진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노량진 거리를 삼색 슬리퍼를 신고, 골목을 맴도는 모습은 나도 노량진도 이제 익숙해졌다. 마치 <여고괴담>의 주인공처럼 시간을 보냈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떠나고 싶다는 갈망과 이곳을 떠났을 때 밀려오는 두려움은 항상 공부의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 나를 남게 했다. 그리고 어느덧 노량진에 남았을 때의 불편함보다 편안함을 예찬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 또래의 취업 준비생은 그런 것을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노량진이었지만, 다른 형태의 제2의 동굴은 존재했다. 난 그렇게 그 동굴에서 30대를 시작했다.


* 이 글은 2019년에 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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