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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우리 너무 쫄지 말자(2)

굳이 사랑할 필요가 있을까. 삐뚤어진 어른 금쪽이의 질문과 결론

by 요다멜리

'왜 굳이 사랑, 사랑, 사랑 타령을 해야 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된 건 오은영 박사님 때문이다. '금쪽같은 내새끼'나 '금쪽 상담소'를 보면 지금 우리가 겪는 결핍이 어린 시절 존재 그 자체로 사랑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많이 보게 된다. 많은 상담이나 심리학 관련한 책, 유튜브들을 보아도 그 결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짜증내며 반응하는 것도, 배우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직장 업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도 다 낮은 자존감 때문이고, 그건 다 어린시절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사실 나는 그 '자존감'과 '무조건적인 유년시절의 사랑'으로 귀착되는 결론에 약간의 환멸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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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부모에 의한 잘못을 현재의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부모로서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사랑'이라는 게 실제로 그렇게 중요한 건지 인간의 생존에 그렇게 필수적인 요소인 건지도 스스로 반박해 보게 되었다.


실제로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훈련되고 교육된 커뮤니케이션 코드나 기술이라는 이론들이 꽤 많이 발견되었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라는 사회학자는 "낭만적 사랑은 현대가 만들어낸 발명품(Romantic love is a modern invention)"이라고 말하고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도 "우리가 사랑이라는 코드를 이해하고 행할 수 있게 훈련된 것(Intimacy is socially constructed; we are trained to understand and perform it)"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물학적으로 동물들에게 모두 발견되는 본질적인 특징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사랑의 경우도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보다 강조되고 요구되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는 체벌을 '사랑의 매'로 미화한 적이 많았다. 회초리를 들고 눈물을 훔치며 아이를 때린다거나 아이가 잠든 뒤 회초리로 상처난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며 우는 부모님을 드라마에서 종종 보았다. 기능 위주의 산업사회에서는 어떻게든 아이를 규율을 잘 지키고 성공하는 아이로 키워야 했다.


반면에 현대 사회는 불안이 높고 감정조절이 힘든 환경인데다가 창조적인 인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아이의 감정을 잘 읽어주고 이에 잘 반응하는 부모가 필요하다. 또한 심리학, 트라우마 등에 대한 연구가 최근 20년간 매우 활발히 이뤄졌고, 이 내용들이 SNS나 미디어를 통해서 급속도로 퍼지면서 육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SNS가 '이상적인 부모상'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SNS는 우리가 외향적으로 잘 꾸미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만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상냥한 부모로 보이고 싶어하는 욕구까지 자극하는 것이다. SNS나 미디어를 통해서 화내는 부모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더 강해진다.

images.jfif 아, 나도 이런 부모가 되고 싶다. 음, 우선 저렇게 날씬한 엄마가 되고 싶다...


루마니아 고아원 실험 때문에 너무 쫄아있었다


많이 알려진 1980~90년대의 루마니아 고아원에서 행해진 실험이 있다. 수천명 고아들의 추적검사를 한 결과 먹을 것은 있었지만 돌봄, 눈맞춤, 포옹, 정서적 상호작용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길러진 아이들은 뇌 발달 지연, IQ 향상 지연, 애착 장애(attachment disorder), 사회성·감정 조절 문제, 심지어 일부는 성장 과정에서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랑과 정서적 돌봄이 실제 생물학적 발달에 영향을 준다는 강력한 증거가 됐다. 많은 소아정신과 박사님이나 심리학자들이 이 실험을 근거로 부모의 스킨십이나 눈맞춤 등이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나 또한 아이를 돌볼 때 이 실험 생각을 하며 최대한 아이와 스킨십을 하려고 하고, 갓난아이 때 수면교육 같은 것은 시도도 해 보지 못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지금도 밤마다 아이를 토닥거리며 재우고 있다(-_-).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반박의 여지들이 꽤 있었다. 루마니아 고아원 아이들이 대부분 죽었다고 말하는데 그 정확한 사망자 수치는 챗GPT도 찾아내지 못했고, 심지어 단순히 애정 결핍이 아니라 총체적인 영양, 위생, 의료 등의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학계의 비판도 많다. 그리고 성장에 지연을 보였던 아이들도 10세 이후에는 회복되었다는 결과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루마니아 입양 연구의 책임자인 Michael Rutter 조차도 "Early deprivation has effects, but the extent varies widely and many children show remarkable recovery.", 즉 아이마다 회복 탄력성 정도에 따라 그 영향이 매우 달랐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연구가 미국 중산층 가정이 추구하는 애착이론에 기반한 편향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바람에 실어보내는 사랑

애정이나 정서적인 교감이 아이 성장에 중요하다는 건 물론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세세한 요구사항들 때문에 큰 맥락을 잊어서는 안된다. 1편에서 말했듯이 사랑은 일관된 방향과 그걸 실천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그 노력과 실천은 보이지 않는 바람이 살결을 스치듯이 상대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행동, 행동', '노력, 노력', '눈맞춤, 스킨십' 이런 명령어만 입력해서 나올 것이 아니라 '상대가 편안하길, 내 사랑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는 큰 방향성을 먼저 점검하고, 그 따뜻한 바람 속에 지속적이고 일관된 나의 행동을 실어 보내는 것이다. 저런 실험 결과와 작은 변수들에만 함몰되어서 억지로 스킨십과 눈맞춤을 쥐어 짜내고 있다면 그건 맞지 않다. 바람이 불듯이, 공기처럼 늘 편안하게 상대방을 감싸는 사랑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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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과거에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해 너무 속박되지 않았으면 한다. 과거에 그런 경험이 뇌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걸 인지하되 그 이후의 경험과 현재의 자기 서사를 통해 충분히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과거의 특정 트라우마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그 이후에 그걸 계속 되돌이표하듯 고착화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에 그 비슷한 자책과 자기비판이 반복되고 축척되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동안 과거 경험 때문에 자신을 계속해서 고문해 왔던 스스로를 깊이 인식하고, 부정적인 경험이나 시각에서 거리를 두고 새로운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학교에서 가족들을 묘사하는 말을 써 보라는 숙제를 받은 둘째는 'My mom is loved'라고 썼다. 우리 엄마는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 거라고 한다. 그 문장 하나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 이제 나 자신에게도,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자. I am loved. You are 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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