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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Dec 13. 2018

#01. 일요일과 세탁기


 내게 검은색 반팔티는 고정값이다. 어떤 계절이라도 검은색 반팔티를 무조건 안에 입기 때문에 주말에 미리 빨래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회사에 입고 갈 옷이 없는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주말 중 빨래를 돌리기 알맞은 날은 일요일이다. 토요일에 빨래를 돌리면 벌써 출근 준비하는 느낌이 든다. 쓸데없이 성실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성실함은 이런 곳 아니어도 쓸데가 많다.
 

 일요일 오후 햇볕이 잘 드는 때 빨래를 시작한다. 세탁기 문을 열어놓고 멀리 물러선다. ‘왼손은 거들뿐.’이라고 외치며 검은색 반팔티를 넣은 세탁망을 세탁기 안에 던져 넣는다. 이쯤에서 우리 집 세탁기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이 분은 굉장히 오래됐다. 너무 오래돼서 존칭을 붙여야 할 정도다. 굉장히 오래됐다는 말 외에 이 세탁기를 수식할 말은 없을 것이다. 일단 세탁기 문을 여는 방식은 흔히 말하는 ‘통돌이 세탁기’를 떠올리면 된다. 요즘 세탁기처럼 문이 정면에서 열리는 게 아니라 위로 열린다. 또한, 탈수할 때 세탁물의 정확한 균형을 맞춰주지 않으면 붉게 표시된 불균형이라는 단어를 삑삑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주하게 된다. 세탁물의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삼십 번의 불균형 즉, 삼십 번의 탈수 실패를 겪고 나면 탈수를 눌러놓고 두 손 모아 기도드리게 된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발로 세탁기를 몇 번 차고, 탈수 돌 때 세탁기를 양손으로 붙잡아 체중을 실어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도 한다. 이게 끝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 집 세탁기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이 세탁기의 가장 놀라운 점은 찬물에 있다. 대부분의 세탁기는 찬물이나 뜨거운 물 중 하나만 나오게 하거나 찬물과 뜨거운 물이 함께 나오도록 설정할 수 있다. 물론 굉장히 오래된 이 고물 아니 이 세탁기에도 그런 기능은 있다. 중요한 건 '기능'만 있다는 것이다. 뜨거운 물은 온천수가 터진 것처럼 콸콸 나온다. 문제는 찬물이다. 찬물을 틀면 마치 새벽에 모아둔 이슬을 하나씩 집어 흘려보내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아주 서서히 극소량만 나온다. 뜨거운 물과 찬물을 함께 틀었을 경우 98% 뜨거운 물로만 세탁된다. 찬물은 과일 맛 음료수에 들어있는 과일 함량만큼 아주 약간, 기분 낼 정도로 나온다.


 검은색 옷을 오래 입으려면 찬물로 빨아야 한다. 뜨거운 물로 세탁할 경우 채 한 달이 못가 물이 다 빠져서 붉은 기가 도는 연한 검정이 된다. 결국 나는 찬물로만 세탁물을 빨아야 하는 것이다. 주말에 세탁기를 돌리려면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헤드폰과 핸드폰 그리고 책과 무중력 의자. 세탁기 안에 세탁망을 넣고, 세제를 골고루 뿌린 뒤 찬물을 선택한다. ‘물이 나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연약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무중력 의자를 펼친다. 의자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 이제 세탁기 따위는 잊어야 한다. 책을 읽다 핸드폰을 보고, 노래도 바꿔 듣고, 귀가 아프면 헤드폰을 벗고, 의자에서 내려와 스트레칭도 하고,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도 하고, TV를 보고, 컴퓨터를 켜서 놀다 잠깐 낮잠도 잔다. 해가 서서히 사라질 무렵 세탁기를 향해 다가가면 정확히 세탁이 끝나 있다. 이야!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탈수가 남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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