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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Sep 12. 2019

#37. 이런 밤을 마주할 줄 알았겠는가

 두 달 만에 치킨을 주문했다. 누군가는 ‘두 달 만에’라는 기간에 의아함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2년과 같은 시간이었다. 먹는 것을 조절하기 위해 밖에서 먹는 일 외에 집에서 배달음식을 먹지 않기로 했다. ‘밖에서 먹는 일 외에’라고 덧붙인 건 회식 때 치킨을 한 번 먹었기 때문이다. 소량. 정말 적은 양을 말이다.


 며칠 째 비가 내리고 있다. 이런 날에는 안전을 위해 배달음식을 주문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나는 배달하는 분이 언제 오는가 하고 베란다에 서 있었다.

 배달이 늦어 죄송하다는 배달원에게 괜찮다고, 조심히 다니시라고 말하면서도 내 눈은 오로지 투명 비닐에 담긴 치킨. 치킨을 향해 있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텔레비전 가까이 작은 상을 펼쳐놓았고 요즘 즐겨보는 프로그램 다시 보기를 결제해 두었다.


 상자를 열자 깨끗한 기름으로 튀겼다는 후라이드 치킨과 반짝이는 양념 치킨이 보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손에 위생장갑을 끼고 후라이드부터 한 입 베어 물었다. 까끌까끌한 튀김옷이 먼저 혀에 닿았다. 이로 육즙이 남아있는 살을 뜯어냈다. 바삭한 소리와 고소함, 부드러운 닭의 육질이 느껴졌다. 만족스러워하며 몇 번 씹었는데 맛이 이상했다. 치킨이 쓰다. 사약을 받은 장희빈처럼 손에 들고 있던 닭다리를 노려봤다.

 “너 왜 써?”


 저녁 9시. 치킨이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시간이다. 게다가 두 달 만에 먹는 것이 아닌가! 한 가지 말하자면 식이요법을 하는 동안(평생 할 생각이다) 오징어집 과자가 너무 먹고 싶어 사놓고는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한 달을 보냈다. 괜한 죄의식이 들어 먹지 않았다.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어떤 지독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렇게 지독하게 하고 있는데. 오늘은 치킨을 먹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먹었는데 치킨이 쓰다니 말이 되는 일인가. 혹시 이것만 그런가 싶어 다른 조각도 먹어보고 양념 치킨도 먹어봤다. 모두 맛이 쓰다. 작은 캔콜라를 따서 마셔봤다. 첫맛은 달콤했는데 끝이 쓰다. 냉장고로 달려가 화강암인가 화산암반층인가 중산층인가 아래층인가에서 끌어올렸다는 물을 마셔봤다. 끝이 쓰다.


 뭘 먹어도 쓰다. 음식이 아니라 내 혀가 문제였다. 인생 살만하면 넘어뜨리고, 살만하면 넘어뜨리길래 다시 좀 일어날 힘을 얻고자 치킨을 시켰는데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살만하다는 것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


 남은 치킨을 비닐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작은 상 위에 치킨 무와 캔콜라를 멀뚱히 세워놓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평생 치킨이 맛없는 이런 밤을 마주할 줄 알았겠는가. 마치 버블티를 먹다 턱이 빠지거나, 껌을 밟았는데 신발이 찢어지거나, 돈가스를 찔렀는데 포크가 부러지는 일처럼 말이다.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말했다. 스스로에게 보상으로 음식을 주는 행위가 건강을 악화시키는 지름길이라고. 보상과 음식이라는 단어를 쓰고 보니 반려견이 된 기분이다. 어쨌든 입이 쓰니 다행인 셈이다. 먹는 걸로 건강을 악화시키는 일을 막았으니 말이다. 쌓여있는 문제들과 치킨마저 맛없는 밤으로 인해 더 심화될 내 스트레스는 어찌할까 의문이지만.


 이토록 슬픈 밤을 맞이한 적이 언제였던가 떠올리며 치킨 무를 하나 씹었다. 쓰지 않았다. 가끔은 치킨이 아니라 치킨 무가 위로해주는 밤도 있구나.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오독오독 무를 씹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온기가 남아있던 치킨은 냉장고에 안치됐고, 무는 하나씩 줄어가고, 콜라는 줄지 않는. 하루는 무심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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