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등단하기 위해 1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글만 쓰겠다던 때가 있었다.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을 결승점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등단만 하면 모든 게 완성되리라 하는 환상 때문이었다. 말로는 소설가가 되고 싶고, 평생 글을 쓰고 싶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언젠가 끝이 나길 바랐던 것. 글을 쓰고 고치는 일이 고되고 지치니까 나도 모르게 ‘어떤 끝’을 원했던 것 같다. 등단만 하면. 좋은 소설만 쓰면. 책만 나오면. 베스트셀러만 되면.
고등학교 때 시를 썼다. 시로 대학교 문창과에 수시로 들어가겠다는 호기로운 생각을 했었다. 물론 다 떨어졌다. 시가 좋아서 쓰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수단이었다. 망측할 따름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학에 들어가 소설을 썼다. 시에 재능이 없음을 알아차렸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살짝 비켜나더라도 무언가 쓰는 행위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초등학교 시절 주머니에 먼지 말고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던 때. 아이들이 장난감 팽이를 가져와 교실 뒤에서 둥글게 모여 신나게 노는데 멀찍이 떨어져서 그런 건 관심 없다는 듯 뒷짐을 지고 그들을, 빙글빙글 도는 그들의 팽이를 힐끗거리던 모습처럼.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내고 비평 수업을 듣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신춘문예 당선자로 신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지금까지 내 이름이 적힌 책 한 권 내지 못했다.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 되면 책과 노트북을 들고 동네 카페에 간다. 자리를 잡고 글을 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엇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재미있으니 됐다. 소설가. 그 꿈이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다. 유명해지지 않아도 괜찮고, 글로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괜찮다. 즐거우면 됐다. 즐겁지 않다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 나에게 글은 수단이 아니라 취미 혹은 회사에 다니는 일과 함께 굴러가는 또 다른 생활이 되었다. 두 개의 삶이랄까.
읽고, 쓰고, 고친다. 기본적인 작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젠가 내 삶이 생각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굴러가고 있는 게 나니까. 굴러가는 걸 보며 어어 하고 있는 것도 나고, 이왕 굴러가는 거 신명 나게 굴러보자는 것도 나고, 그러면서 마음에 생채기를 입는 것도 나다. 뭐 어떡하겠는가. 세상에 태어나 한 가지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이제 내게 결승점은 없다. 목표를 두고 쓰는 글은 없는 셈이다. 포기는 아니다. 눈을 먼 곳으로 옮겼을 뿐. 되기 위해 쓰지 않는다. 쓰다 보면 될 테니까.
남이 볼 때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 수 있다. 간혹 그런 얘기를 듣는다. 회사 일도 힘든데 퇴근 후에는 쉬라거나 주말에는 편하게 있으라는 말들. 뭘 그렇게까지 애쓰냐는 말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달려가 안아주고 싶다. 이렇게 외치면서. 오, 신이시여! 이 가련한 영혼을 어찌합니까!
그들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내가 무엇을 쌓아가고 있는지. 내 소설 속 인물들과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어떤지 말이다. 현실이 만져지는 걸 쓰려한다. 마냥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소설은 아니다. 일상의 '어떤 찰나'를 보여주고자 한다.
하나는 회사원. 다른 하나는 작가. 밥벌이는 회사원인 내가 해주고 즐거움은 작가인 내가 해주니 이 얼마나 풍족한 삶인가.
즐겁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괜찮다. 가지지 못한 사람도 무언가 쓸 수는 있으니까.
오늘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