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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Nov 07. 2019

#50. 발이 시리다

 왜 하필 지금인가. 아침의 나는 무얼 했단 말인가. 어째서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여 사태가 여기까지 오도록 만들었나.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오른손으로 왼발을 만지작거리며 한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모임이 끝난 뒤 시작한 술자리는 2차로 자취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누군가와 같이 살았기에 홀로 사는 사람의 집을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가 가기로 한 집은 당시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집이었다. 느닷없이 집에,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간다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 사람 집에서 신발을 벗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내 무릎을 발로 찬 것처럼 나도 모르게 절을 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신발을 벗다가 갑자기 허물어지는 나를 봤다면 왜 그러냐고 어디 다쳤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신발을 벗고 발을 딛는 순간 왼쪽 엄지발가락이 나를 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이상하다. 저 친구가 지금 보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흰 양말 속에서 다른 발가락들과 마찬가지로 굴곡만 나타내고 있어야 하는데. 저렇게 속살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긴급. 긴급 상황이다. 나는 급하게 몸을 웅크리며 발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 집에 처음 가는 상황이었기에 약간 어색해하며 앉지 못한 채 서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즉 아직까지는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 구멍난 내 양말도.


 집주인은(물론 월세) 우리를 바닥에 앉게 하고는 상을 폈다. 몇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안주들을 펼쳤다. 원룸이었고 방이 크지 않았기에 몇 명만 일어나 도왔다. 자꾸만 양말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왼쪽 엄지발가락을 숨기기 급급했던 나는 구석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애써 밝은 얼굴로.


 속으로 빌었다. 내 옆자리에는 앉지 말아라. 제발 그녀가 내 옆자리에 앉지 않도록 하소서. 보통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 앉길 바랄 텐데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정확히 내 오른편에 앉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앞으로 소원을 빌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조금만 고개를 숙인다면 내 왼쪽 엄지발가락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자리였다.


 술자리는 꽤 오래 이어졌다. 좋은 사람들이었고, 대화가 잘 통했기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술이 계속 들어가고, 맛있는 음식에, 게다가 옆자리에는 그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가! 웃고 떠들다 보니 발이 시리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 발이 시리네.”


 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했는데 말로 내뱉는 헛짓거리를 해버렸다. 차라리 왼발을 상 위에 올려놓고 내 양말을 좀 봐. 구멍이 났어. 이게 아침부터 그랬을까. 그건 아닐 거야. 조금씩 발톱이 자라서 뜯은 거 아닐까. 이것 봐. 내 왼쪽 엄지발가락이 두더지 게임처럼 빼꼼하고 양말을 뚫고 고개를 내놓고 있잖아.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발이 시리다는 내 말과 함께 그녀의 시선이 내 발로 향했다. 나는 아차 하며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그렇지. 손은 눈보다 빠르지 않던가. 다만 술을 먹지 않은 상황이어야 한다. 정확히 내 오른손이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로 양말을 쑤셔 넣어 구멍을 숨기는 동시에 그녀가 내 발을 봤고 다시 나를 올려다보더니 씩 하고 웃었다.


 뒤의 일은 기억나질 않는다. 물론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은 아니다. 혼비백산이라는 말이 어울리려나. 나는 어찌어찌 버티다가 가려고 일어나는 사람들 속에 섞여 빠르게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라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녀가 말해주었다. 숨기려고 하는 내 노력들을 쭉 봤다고.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고 말이다. 그녀는 얘기를 듣고 멋쩍어하는 나를 보며 귀여웠어. 하곤 말을 마쳤다.


 때로는 숨기고 싶은 일이 뜻하지 않은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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