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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Dec 01. 2019

#53. 고개를 기억하는 밤

 잘 좀 부탁해요. 말하곤 고개를 숙였다. 군대 선임의 손을 정중하게 양손으로 잡은 채였다. 아버지의 숙여진 고개 뒤로 보이는 뒷머리에는 그가 입고 있는 흰색 패딩만큼이나 바랜 흰머리카락들이 풀이 죽은 채 매달려 있었다. 느닷없이 그 장면이 떠올랐다. 병원 창문을 통해 보이는 어두워진 하늘에 희다.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찮은 색을 가진 별이 몇 개 떠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검은 하늘에 별을 이어 별자리를 만들듯 색 바랜 별 몇 개를 이어 늙은 아버지의 숙인 고개를 떠올리는 밤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스물한 살이 되어 처음으로 다른 지역에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군 복무를 시작한 것이다.

 그날.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이동하기엔 너무도 먼 그곳을 옵션이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작은 흰색 소나타 차를 타고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날 보기 위해 새벽부터 달려오고 있었다. 입대하는 날 건강하게 계시라 큰절을 하고 떠난 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군부대 정문까지 인도하기 위해 선임 중 한 명이 막내인 나와 동행해야 했다. 최고참 선임 둘은 서로 네가 가라고 미루고 미루다 가위바위보를 통해 갈 사람을 정했다. 전날 저녁부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친 채 함께 나갈 선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처럼만 동작을 빠르게 한다면 앞으로 지내면서 욕먹을 일은 없을 거라며 선임 몇몇이 외박 나가는 나에게 장난을 쳤다.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 주말에 편히 쉬는데 부대 입구까지 걸어가는 게 귀찮아서 그런 걸까 생각하는데 같이 걷던 선임이 말했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군대에 빨리 와서 최고참이 되었다지만, 기껏해야 얘도 나처럼 스물한 살이었다.


 "누구 첫 외박 나갈 때마다 이렇게 같이 나가는 거 되게 부담돼. 아니, 그렇다고 너보고 외박 나간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라. 보통 첫 외박 나가면 가족들이 오잖아. 그럴 때마다 어르신들이 아들 잘 좀 부탁한다고 하거나 자꾸 뭔가 주려고 하시는데 그게 좀 그래. 내가 뭐라고."


 저 멀리 부대 입구에 세워진 흰색 소나타 차가 보였다. 손을 흔드는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우뚝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그는 눈이 내려 하얗게 뒤덮인 강원도 화천의 겨울에 어울리는 군데군데 때가 탄 흰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옆에 선임이 있었기에 묵묵히 발맞춰 걸었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선임을 소개했다. 잠시 뒤 선임에게 외박 시 지켜야 할 규정들을 다시 들었다. 인사를 마치고 어머니 누나와 함께 차로 걸어가는데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선임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그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가을에 빳빳했던 허수아비의 목이 겨울이 되어 푹 꺼지듯. 겨울 텅 빈 논밭에 간혹 보이는 허수아비들처럼 말이다.

 선임은 떨어지는 아버지 고개에 맞춰 자신의 고개도 수그렸다. 아버지는 선임과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외과 수술 후 병원 침실에 누워 있는 밤. 반쯤 내려간 블라인드 밑으로 보이는 검은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실내등이 모두 꺼져있어서였을까. 하늘에 별 같은 게 몇 개 보였다. 빛나는 것끼리 잇다 보니 그날의 아버지 고개가 떠올랐다. 눈앞이 핑 돌더니 10년도 넘은 그 순간에 도착했다. 갖가지 사건들을 떠올리다가 끝내 아버지가 병실에 누워 있던 마지막 모습까지 다다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모두 검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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