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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랑 Nov 17. 2019

#52. 내가 좋아하는 것들

 겨울. 비 오는 날 별다른 일없이 창문을 통해 비가 내리는 걸 바라보는 것. 강아지. 기분 좋게 경험했던 걸 똑같이 반복하는 일. 읽었던 책이나 영화, 게임을 반복해서 하는 것. 소설. 산문.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시트콤. 내 방 침대에 누워 가사 없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 놓고 멍하니 누워 있는 것. 불을 다 끄고 작은 스탠드 등에 의지해 책을 읽는 것. 주말마다 동네 카페에 가서 글을 쓰는 것. 동네 카페에 갔는데 내가 늘 앉는 자리가 마침 비어 있는 것. 커피 대신 마시기 시작한 민트 티가 잘 우려져 깊은 맛이 나는 것. 시. 눈이 내리는 날 일이 있어 밖에 나가는 것. 가족. 금요일 출근길. 브런치에 연재하는 내 글을 발행하는 목요일 아침 출근길 버스 안. 뷔페. 오징어집 과자. 산타클로스. 겨울에 나 홀로 집에 영화 시리즈를 보는 것. 책을 읽고 다 함께 얘기하는 모임. 내 글이나 남의 글을 읽고 논하는 자리. 초고를 끝낸 뒤 노트북을 접어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을 때. 음악. 깨끗한 옷. 주말마다 빨래를 돌려 널어놓은 반팔 티셔츠와 흰 수건들. 글을 쓸 수 있게 도와주는 맥북. 출퇴근 중 또는 글을 쓰거나 쉬고 싶을 때 음악을 들려주는 이어폰.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소설집에 들어 있는 지상의 주민들이라는 단편 소설. 어릴 적 동네 비디오방에서 500원에 한 권씩 빌려 읽었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 백 번은 읽은 삼국지. 가사 모르는 외국 팝송과 재즈. 첼로로만 연주되는 클래식 음악. 복숭아 맛 아이스티. 비행기 안에서 보는 해리포터 영화. 라라랜드. 검은색 옷. 그날따라 잘 손질된 머리 스타일. 좋아하는 사람과의 약속. 생일 때마다 갔었던 지금은 없는 그때 그 동물원. 트럭에서 파는 옛날식 통닭. 아빠가 있는 생극 가는 길. 생극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보는 풍경들. 모닥불. 착하고 뻔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그 얘기로 밤을 지새우는 일. 처음 가보는 그 사람의 원룸. 술 없이도 재밌고 즐거운 자리.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느라 깜빡임이 잦아든 눈. 키스. 큰 침대가 놓여있는 쾌적한 호텔. 브로콜리와 스크램블, 수프, 소시지가 있는 호텔 조식. 퇴근길 버스에 탔는데 내가 늘 앉는 맨 앞자리가 비어있는 것. 갑자기 올려다본 하늘에 구름이 적당히 놓여 흘러가고 있을 때. 백색소음이 계속 들리는 가운데 이어폰에 있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주위를 싹 조용하게 만드는 것. 새로 산 옷이 기존의 옷들과 이질감 없이 어울릴 때. 닉 우스터. 끈이 꽉 매어진 워커. 새로 출시된 기계들을 직접 만져보고 써보는 것. 약속한 사람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그가 언제 오나 하고 문 주위를 기웃거리는 것. 시집에서 좋은 구절을 발견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남겨두는 것. 문득 떠오른 생각들을 적어두는 노트. 해외여행 가기 위해 짐을 꾸리는 것.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몸에 오는 반응. 외국인들과 못하는 영어로 얘기하는 것.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는 나. 바라는 것만 잔뜩 들어있는 기도. 찬바람이 들어와 추운데도 창문을 닫지 않고 이불을 덮는 것. 12월 31일 늦게 퇴근한 어머니와 맛있는 음식을 주문해 먹으며 1월 1일을 맞이하는 것. 어색하게 새해 복 많이 받아 엄마 하는 것. 친한 사람들에게 미리 써놓은 새해 인사 문자를 하나씩 발송하는 것. 누군가 쓴 글을 내가 처음으로 읽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아도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편한 마음이 드는 식사자리. 광화문 영풍문고 가는 길에 있는 군밤 할아버지. 광화문 교보문고 회전문이 있는 입구에 서 있는 선량한 눈을 가진 경비원들.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사람들. 글쓰기. 토이스토리 1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방 벽지 색 농도의 하늘색. 예전 사진들을 꺼내 보는 것. 타자기 소리. 무언가 속에 가지고 있던 걸 써 내려가는 내 손. 단편소설. 노트북을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받쳐주는 은색 받침대. 밤에 당신과 하는 산책.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사선으로 떨어지는 눈과 책 무게를 지탱하는 손. 시선. 웃음.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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