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벌레

by 김영빈

겨울이면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밤벌레.
밤을 파먹는 쌀벌레만 한 녀석이 아니라, 밤나무 속을 파먹고 사는 내 엄지만 한 녀석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선 밤나무 장작을 패다 보면 톱밥 속에서 그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어느 집에서 밤나무를 벤다 하면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들었다. 먼저 잡겠다고 혈안이 된 얼굴들.
지금 생각하면 야만 같고 원시인 같지만, 밤나무 톱밥의 향긋한 냄새가 밴 구워먹는 밤벌레의 달고 고소한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시간을 쉽게 웃어넘기진 못할 것이다.
외가와 한 동네에서 자라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외가에서 보냈다.
겨울이면 큰외삼촌이 아름드리 밤나무를 베어 장작을 패셨고, 나는 아랫동네 아이들 몰래
밤벌레를 독차지하곤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며 밤벌레를 볼 일은 점점 사라졌다. 아궁이에 불을 땔 일도 줄었고, 밤벌레 말고도 먹을 것은 많아졌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외삼촌은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날은 무릎까지 빠질 만큼 눈이 펑펑 쏟아졌다. 마당에서 밤을 새는 사람들을 위해 한 번도 직접 베어본 적 없던 밤나무를 여러 그루 베어다 이틀 밤 내내 불을 지폈다.
눈도 펑펑, 눈물도 펑펑.
그래도 울음을 삼키며 톱을 앞뒤로 밀었다.
베어낸 밤나무마다 밤벌레 구멍은 숭숭 나 있었지만, 어릴 때처럼 철없이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밤벌레는 어느 곤충의 애벌레였는지 궁금하다.
몇 해 전 내소사에서 본 한 장의 사진이

기억 속 밤벌레와 너무 닮아 보였다.

아마도 사슴벌레의 유충이 아니었을까 싶다.

뜬금없는 밤벌레 이야기에 ‘발행’을 누르기 전
잠시 망설이게 되지만, 그래도 이 좁은 땅 어딘가에선 저런 겨울도 있었고,
나에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기억이라는 걸 조심스럽게 남겨둔다.


#밤벌레

#겨울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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