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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May 13. 2020

핑크피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정리를 해야지. 지난 메모장을 켜니 180여 개가 넘는 메모가 주르륵 쏟아진다. 다른 폴더에는 380여 개의 메모들이 들어있다.                     


-어스름할 때 저녁 외관     

-이곳은 어떤 식당이니?     

-오이지 낮씬     

-Hello.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 그때의 내가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차곡히 준비해온 기록들이 성실하게 적혀있다.                                                        



3년 동안 음식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지역 향토음식을 다뤘다.     

홍어.

혐오와 애정의 경계에 있는 식재료.                     

                 

슬프게도 음식은 자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주로 새로운 문화가 충돌하고 있는 지리적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민자들.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면 그들이 가져온 음식들이 문제가 된다. 부족한 일자리와 자원을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갈등은 음식과 사람을 매개로 촉발된다. 특유의 향취, 독특한 맛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들이 문제의 본질을 가리며 대리전을 치른다. 인도인은 카레가 되고 한국인은 김치가, 일본인은 스시로 그리고 전라도 사람은 홍어가 된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혐오, 혐오는 전이된다.           

          

대부분의 혐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잘 알지 못하는 상태,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은 생존본능과 뗄 수 없는 감정이다. 위협이 될지도 모를 타자를 발견했을 때, 인간은 쉽게 공포에 사로잡힌다. 공포는 불편한 감정이다. 그 불편함은 곧장 분노로 이어진다. 잘 알지 못하는 상태를 제거하고자 하는 욕망은 타자를 향할 때 공격성을 띤다. 미지의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타자를 제거함으로써 불편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프로그램 기획을 시작했던 2017년, 그리고 한창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2018년은 혐오가 절정인 시기였다. 새로 발생한 현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내재돼있던 혐오가 대상을 전이해갔다. 전라도를 대상으로 아주 오랫동안 공고하게 작동해오던 혐오는 2000년대 여성과 성소수자를 경유해 이주민으로 이동한다. 각자 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반격하기 쉽지 않은 비주류 소수자들이었다.             

        

2018년 초여름, 혐오는 극렬하게 폭발했다.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들. 미지의 대상으로서 한국에 이토록 이질적인 존재들이 또 있었겠는가. 무슬림 남성들에 대한 공포는 빠르게 사회로 전염돼 각종 혐오발언들로 이어졌다.                     


미지의 것을 알아가고자하는 용기는 좀처럼 쉽게 생겨나지 않는다. 공포와 패닉의 순간들을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마주한 대상이 괴물도 악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순간이 오면 그토록 두려워했던 대상이 사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질적이지만 이해 가능한 범위에 있는 존재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후에야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이해하고 음식을 나눈다.                     


미식의 도시, 쿠알라룸푸르              

      

홍어를 먹는 지역들을 찾아다녔다. 대체로 미식으로 유명한 도시들이었다. 도시들은 각 자의 이야기를 접시 뒤에 숨기고 있었다. 대체로 아름다웠고 대체로 문제가 있었다. 인종갈등과 이주민 혐오는 언제나 보편적인 문제들 중 하나였다.      


취재로 들렀던 곳 중에 인종간 갈등이 가장 끔찍한 결과로 나타난 곳은 말레이시아였다.      

말레이시아는 수많은 인종들이 섞여 사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말레이계, 중국계, 그리고 인도계 3인종이 가장 큰 인구비율을 구성하고 있다. 갈등도 극렬하다. 1969년 5월 13일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총선 직후 인종간 학살이 발생한다. 선거에 압승한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행진을 벌이자 분노한 말레이인들이 이들과 충돌하며 일어난 비극이었다. 50여 년이 지났지만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잊히지 않는 큰 상처로 남아있다. 희생자들의 묘지는 방치되었고 제대로된 사망자 수 파악조차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섞여 산다. 그토록 끔찍한 일을 겪은 곳이지만 이들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발언은 금기시되고 보도통제가 엄격히 이뤄지고 있지만 장사를 하고 음식을 만들고 학교를 다니는 이들은 한데 섞여 일상을 보낸다.                     


말레이시아는 주석을 채굴해 무역길에 오르던 시절부터 아시아에서 비교적 빠르게 경제가 성장해온 나라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에도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정말 많다. 인도계 식당에서는 뜨거운 화덕을 두고 빠르게 난을 만들어낸다. 교역을 통해 얻은 각종 향신료를 이용한 커리도 발달해있다. 진흙 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 다양한 해산물이 나는 나라답게 재빠르게 웍을 이용해 볶아내는 중국식 해산물 요리도 유명하다. 이들은 각자가 떠나온 곳에서부터 배워온 대로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서로의 영향을 받아 인종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음식들을 만들어낸다. 커리와 국수가 만난 '락사'는 말레이시아를 상징하는 대표 음식이다.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서로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함께 학교를 다니며 성장해왔습니다. 중국계 친구와 가져온 국수를 나눠먹으면서요.      

그게 저는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말레이계 셰프는 5.13에 대해 묻는 내게 이렇게 대답했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어쩔 수가 없다. 갈등은 언제나 존재하고 극렬하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 사회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만난 수많은 중국계 친구들. 서로 언어는 다르지만 살을 맞대며 성장한다고.

      

말레이시아에는 음식만큼이나 다양한 명절이 존재한다. 중국의 명절과 무슬림의 명절 그리고 인도의 명절까지. 명절에 사람들은 친지들을 초대한다. 당연히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이 참석할 수밖에 없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인도인들은 소고기를 기피한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의 명절에 타자를 위하는 음식을 낸다. 주로 닭고기다. 함께 나누는

음식에 배려와 이해를 담는다. 그렇게 서로의 문화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두려운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서로의 눈을 보며 이름을 부르며 성장해온 동료이자 친구가 된다. 말레이시아 인들은 친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식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대접한다.                  

   

세 인종이 함께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내는 식문화는 그래서 더 다채롭고 아름답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도시, 쿠알라룸푸르의 명성은 그렇게 쌓아 올린 결실이다.           

          

미식은 용감한 자들의 것

   

새로운 음식을 먹는다는 것만큼 용감한 행위가 있을까? 미각만큼 보수적인 게 없다. 우리는 익숙한 음식을 안전하다고 느낀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안전한 선택을 강화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익숙함은 좋은 것이다. 안전한 선택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생존의 문제에서 미지라는 것은 위험한 영역이다. 위험하기 때문에 금기시된다. 기피하는 음식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에는 친숙한 주식이 정해져 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난다. 익숙한 음식 말고 독특한 미각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들은 거침이 없다.         

            

여행을 같이하다 보면 두 유형의 사람들을 겪는다. 최대한 익숙한 음식을 선택하는 전자와 가장 모험적인 식단을 선택하는 후자. 때로는 엄청난 실패를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여행은 후자와 함께할 때 더 즐겁다. 새롭게 도전한 음식에 맛을 들이면 딱 그만큼 세계가 넓어진다. 하몽과 치즈와 고수는 지금도 다른 재료들과 뒤섞여 내 식탁 위에 오른다. 새로운 맛의 지도가 그려진 셈이다.           

          

어쩌면 이것은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미지의 음식을 두려워하는 데서 벗어나 다양한 식자재에 얽혀 든 문화와 배경을 이해하는 순간, 더 크고 놀라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음식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채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한 경보음이 켜지고 두려움이 적개심으로 번질 때, 움츠려 들어 퇴각하지 말고 미지의 대상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내딛는 용기. 그 용기가 우리를 친구로 만든다. 앎이 공포를 물리친다. 각종 멸칭으로 손쉽게 덮어버린 타자의 진짜 모습을, 그들의 영혼이 담긴 눈을 비로소 직시하는 순간, 혐오는 깃들 장소를 잃게 된다.      

               

아이슬란드, 뉴욕, 말레이시아와 중국 그리고 흑산도와 나주. 전라도 사람들을 모욕하는 단어로 악용되어온 홍어의 본 뜻을 돌려주기 위한 기묘한 여행을 떠났다. 3년 동안 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음식들을 만났다. 음식에 얽힌 다채로운 이야기와 풍부한 문화적 배경은 음식 그 자체만큼이나 흥미로웠다.


한 접시의 음식을 통해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역사가 수많은 차원의 장소와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더디지만 학살과 야만의 시대를 지나 관용과 문명의 시대를 향해 전진해온 인류의 발자취를 기억하게 한다. 사람을 살리고 굶주림을 물리쳐온,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함께 성장해온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요소.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라는 것. 말레이시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이 여정의 끝에서 당신의 식탁이 더 용감해지기를 응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지를 두려워말고     

더 용감한 선택을 하길.     

더 멋진 모험을 떠나시길.      

미식가가 되어     

매일매일 새로운 식탁을 마주하시길.     

그리하여 테이블 끝에 앉은 타인의 두 눈을 들여다볼 때까지.                                                                      






메모장 마지막 부근에는 이런 메모가 있다.                     


-말레이시아 인사말 중에      

'수다 마칸'     

이란 말이 있다.                     

'식사는 하셨나요?'란 뜻이다.                     

한국에서처럼 사랑과 정이 담긴 언어라고 한다.        


            

핑크피쉬     

201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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