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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Jun 14. 2020

어딘지 우주를 항해하는 것 같은

편집일기

방송은 독특한 일이다. 글을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 또는 제품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경험이다. 사진을 촬영하거나 영화를 만드는 것과도.


그중에서도 편집은 정말이지.




편집기 앞에 앉아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은 가편을 이렇게 바꿨다 저렇게 바꿨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엎드려 울었다 잠깐만 자다 나올까 기지개를 켠다. 한 컷 한 컷 촬영해온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몇 백개가 넘는 원본 파일들의 위치를 되짚어 보며. 아 아까 그거 좋았지. 어느 부분이었지?


원본을 빠르게 스킵하며 훑는다. 하루 분의 시간이 고스란히 데이터화 돼있다. 촬영감독은 빛을 보며 그림을 만들어낸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이는 카메라가 덜컹 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아마도 이 부근이었는데.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악수를 건네고 아마도 어느 정도 서로를 불신하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인터뷰를 어미까지 분해해 적은 두터운 스크립트를 뒤적인다. 아 여기다. 재빠르게 찾아낸 클립의 일부를 시퀀스 라인으로 올린다. 아니러니 하게도 신뢰는 모든 촬영이 종료된 시점에 생긴다. 수고하셨습니다. 맞잡은 손에 그제야 힘이 실린다. 잘 끝났네요.


포워드, 포워드.


오랜 시간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는다. 몇 번이고 반복해 보는 바람에 너무 익숙해진 영상을 낯설게 할 요량으로 고개를 45도 기울여 화면을 본다.


컷마다 구도가 있다. 영상은 사진의 연속적 배열이므로 당연하게도.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촬영 감독마다 다른 구도를 잡는다. 기울여 바라본 모니터 안에서 그들이 잡아낸 영상이 움직이고 있다.


수많은 회의를 하고 콘티를 그려도 최종 결과물은 대부분 머릿속 그림과는 다르게 나온다. 텔레파시가 가능하다면 모를까 아무리 호흡이 맞아도 완벽히 같은 생각을 할 순 없는 법이다. 촬영 구성안과 편집 구성안 사이의 빈 지점은 나와 다른 타자들의 눈을 통해 만들어진다. 초기 기획안과 다른 어떤 미싱 링크, 그러니까 공백이 이때 생겨난다.


A선배의 영상은 미적으로 아름답다. 세심하게 출연자를 배려하면서도 그에게는 피사체가 스스로를 드러내기까지를 기다릴 줄 아는 집념이 있다. 흔들림도 없이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집요하게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는다. 아, 저 표정. 하는 순간 순식간에 넓게 쳐놓은 그물을 조인다. 줌인. 피사체의 표정이 완전히 화면에 잡혀있다. 놓치는 법이 없다.  


B선배의 영상은 다채롭다. 지루한 걸 싫어하는 그는 구도를 다각도로 변주한다. 빠르고 수다스럽고 화려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카메라는 경쾌하게 움직인다. 놓친 부분은 다른 각도로 상쇄가 가능하다. 화면을 몇 번이나 쪼개고 넓히면서 영상을 만들어나간다. 변칙적인데 안정적이다.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영상이 화면 안에서 생동한다. 제각기 다른 매력의 영상들. 그러나 그들의 카메라에는 공통적으로 오랜 시간을 현장에서 보내며 다져온 실력이 두텁게 쌓여있다. 그들이 성실히 보내온 그 시간들에 대한 믿음은 편집실에서 좀처럼 풀리질 않는 작업에 초조한 마음으로 촬영 원본을 뒤지는 정서불안의 편집자를 안정시킨다. 확실히 하나의 독자적인 생명체 같다. 꿈틀거리는 영상을 다시 되돌려본다.

   

나의 눈이 아닌 타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거기에 있다. 처음 혼자서 상상했던 영상과는 다른 어떤 것이, 그러니까 같은 주제와 같은 대상이지만 나와 다르게 바라보는 다른 시선이 있다는 게. 절대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 그 공백이 무척 매력적이다. 어떻게 해도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변수가 생동하는 화면. 그들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홀로 바라본 세상보다 더 아름답다.


대나무 사이로 몰아치는 눈보라가 역광을 받으며 깃털처럼 흩어진다. 묘지 위로 떨어지는 별들이, 매일 걷던 길 위로 내려앉는 노을이,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화면에 담겨있다. 내가 놓친 것들, 미처 보지 못한 것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알지 못했던 세상의 단면들이 그들의 눈을 통해서 내게 전달된다.


이런 세상도 있다고. 이런 마음도 있다고. 이런 순간들이 있다고.


뒤척이느라 엉망이 된 머리를 다시 올려 묶는다.

홀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방송에서는 그렇다.

거슬리는 손목시계를 풀러 키보드 옆에 둔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찾아낸 새로운 영상을 중심에 두고 초기에 구상했던 편집 방향을 완전히 뒤엎는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 나은 방향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수많은 타인들이 함께 하며 공백을 줄여가는 작업이다. 혼자만의 작은 세상은 그렇게 부서졌다가 다시 확장된다. 이렇게 함께 만들어낸 영상은 전파를 타고 또 다른 미지의 타인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또 다른 의미겠지.


어둠이 내린 회사에서 불을 켠 채 편집실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어딘지 우주를 항해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암흑을 뚫고 깜빡이는 모니터에 의존해 서로 다른 데이터를 수합하고 세상을 재구성하며 전진하는 우주선. 5분씩, 10분씩 운행 거리를 늘려가다면 언젠가 어딘가에 가닿겠지.


잠이 모자라기도 해서겠지만 언제나 이 작업을 경이롭다고 느낀다. 우리가 발신하는 이 메시지가 결국은 누군가에게 도달한다는 것이.

나의 세상이 당신의 세상과 이런 방식으로 만난다는 것이.

어딘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편집은 정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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