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scene-광주 청년들
이 도시가 싫었다. 오랜 시간을 거의 떠난 적 없이 살다 보니 그토록 반짝였던 것들이 빛을 잃고 특별했던 것들이 염증이 됐다. TV를 틀면 매 번 나오던 똑같은 사람들. 교수, 강사, 정치인, 그리고 생활정보의 달인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진짜 지역의 보통 사람들, 무엇보다 우리 나이 또래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졌다.
지역에는 청년의 흔적이 없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대부분 서울에 산다.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들로 일상을 채우고 있는지, 관공서에서 제공하는 통계 자료의 수치 너머 살아 숨 쉬는 청년들은 이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긴 시간을 한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흠결들이 더 잘 눈에 띈다. 오월이 아닌 나머지 시간 속 광주는 다른 도시와 비슷한 곳이다. 좋은 일자리는 언제나 모자라고 소비도시인 데다 심지어 특정할만한 큰 산업도 없다. 청년들은 대체로 졸업 후에 직장을 찾아 서울로 향한다. 떠나는 청년들을 붙잡아야 한다는 목표는 어느 지역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절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지역에서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질 않는다. 돌아오라고 하긴 하는데 잡은 물고기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방향이 틀린 건 아닐까?
여기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 왜 남기로 했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역 청년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던 이들을 직접 만나기로. 그렇게 결심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있거나 회사에서 근무를 하거나.
각자의 방식대로 이 곳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청년들을 차분히 마주하다 보면 각자의 이야기가 유성처럼 쏟아져내렸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 도시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TV에서는 오히려 만나기 어려운 보통의 존재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들. 기이하지도 유별나지도 않은, 그러나 누구 하나 같지 않은 고유의 특질들이 오히려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서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두서없이 오가는 이야기 속에 섞여 들었다.
지역에서 클러빙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창작집단, 선교사들의 초기 정착지였던 양림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화기획가, 청년 정치인, 로컬 맥주와 문화상품을 기획하는 크리에이터, 도시 최초의 게스트하우스 운영자, 힙합씬에서 지역 간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하고 있는 디제이.
'이 도시의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어느 시간의 도시를 제일 좋아하나요?'
따위의 질문에 '저 이거 무슨 프로그램인가요?'라며 웃던 청년들은 이내 일상 속에 묻혀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촬영은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잡지 인터뷰에 더 가까울, 지인과의 잡담보다는 조금 더 공식적인, 좀 희한한 사전조사였다.
생각보다 많은 청년들이 이 도시를 떠났던 경험을 공유했다. 경쟁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지역에 머물게 된 정체된 사람들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났고 그 경험을 통해서 다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이 도시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우선시하는 가치를 위해 내린 용감한 결정의 결과가 오늘 이곳에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하루인 셈이다.
동명동에서 자신의 색을 살린 독특한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장보원 씨는 화교 3세대다. 셰프로 일을 시작한 후 그는 서울에서 미국으로 떠났다. 셰프라는 커리어의 미래를 보고 싶었다고 한다. 다양한 식당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그는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가 광주에서 두번째로 오픈한 보보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는 샤오쯔라는 닭냉채 요리다.
저희 할아버지가 화교 1세대인데 산동지방에서 오셨어요. 할아버지랑 기억이라고 해봤자 한 유치원생? 그 쯤인데 초등학교쯤이었을까? 그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은데 아무래도 음식을 먹었던 기억은 잘 남잖아요.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아니면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배워서 해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느 날 샤오쯔란 음식을 먹게 됐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냥 샤오쯔라고 하는 거야라고 알고 있다가 나중에 그 음식의 이름을 생각해보니까 샤오는 중국어로 태우단 뜻이고 쯔는 닭이에요. 태운 닭인데 차갑게 먹는 거예요. 그래서 왜 이름은 뜨거운 음식 같은데 차가운 음식일까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산동 지방에서만 먹는 음식인 거죠. 이 음식이 산동으로부터 광주에 사는 저한테 전해졌다는 게 의미 있는 거 같고 한국에서 화교로 살면서 힘든 것들도 생각나게 되고, 음식이 많은 걸 담고 있구나 이런 걸 생각하게 됐죠.
디아스포라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살고 있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함께 뿌리를 굳건히 내릴 수 있는 장소의 유무다. 자녀들에게는 그런 안정감을 주고 싶다고 했다. 오래 겪어 익숙한 공간은 그에게 근사한 장소다. 똑같은 형태로 구획되는 신도시가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누볐던 골목길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 개인의 색을 덧입혀 낡아가는 주거공간이 매력적이다.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셰프의 색이 묻어나는 독특한 가게가 많아지는 것, 그래서 어느 지역을 여행할 때 그곳의 음식들을 연상하게 되는 것, 최종적으로는 그 음식을 맛보기 위해 기꺼이 여행을 떠날 결심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가 넘쳐나는 곳이 그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도시의 즐거운 모습이다.
뭔가 결핍돼 봐야지 그게 소중한 줄 알잖아요. 그거랑 똑같이 디아스포라로 살다 보니까 물론 3세대라 그렇게 막 깊이 느끼진 못하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 느끼잖아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했던 말들이나 차별받았던 말들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간접적으로 박혀있어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제 자식한테까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한 번은 뭐 아이를 키우는 입장으로서 조금 더 좋은 환경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처음에. 전에는.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거기 환경이 좋더라도 거기에 융화되지 못하면 그렇게 윤택한 삶은 아닌 거 같아요.
그의 가게는 동명동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다. 아는 사람만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 끝에 위치한 보보 식당에서 장보원 씨의 목표는 중식 본연의 레시피를 충실하게 구현해내는 유니크한 가게로 자리 잡는 것이다. '보보 식당 가게 광주 갈래?' 라며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창원 출신의 박재만 대표는 광주에서 피자를 만든다.
'광주에서 피자요? 왜죠'란 생각도 잠시 응 그래 광주라고 오리탕이랑 애호박찌개만 먹으라는 법은 없잖아. 빠르게 첫 질문을 바꿔 물을 준비를 했다. 큰 유리창과 피자 로고가 귀여운 그의 가게에는 턴테이블과 엘피판들이 준비돼있다. 디스코볼이 돌아가는 이층 좁은 계단을 오르면 마스터 카드 문구를 비튼 'We accept pizza'라고 새겨진 야구모자나 티셔츠 같은 굿즈들도 진열돼 기간 한정으로 함께 구입할 수 있다(현재는 모두 품절, 너무 귀여워서 구입하고 싶었는데 당분간은 재판매 예정이 없는 것 같아서 슬펐다).
기본적인 플랫폼은 피자라는 플랫폼인데 그 안에서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다루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음악이라는 서브컬처 디제이 씬을 (주로) 다루고 있고. 다양한 음악, 미술, 이런 아티스틱한 부분들을 지원하고 저희 공간에서도 다른 분들이
(만나) 볼 수 있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왜 하필 광주로 온 걸까? 서울에서 음반사를 운영하며 디제잉을 하던 그는 사업차 들른 광주에 정착했다. 올 해로 8년째다.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고속도로 톨게이트 지나고 있잖아요. 광주 입구를 들어오는 그 순간이요. 그 순간에 도시가 넓게 펼쳐지는 게, 그게 너무 좋았어요. 여기에서 살아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도신데 건물이 낮아요. 논밭이 펼쳐진 곳도 있는데 또 도시거든요. 그 느낌이 좋았어요.
경남 사람인 부모님들은 무척 걱정을 많이 하셨다. 연고도 없는 전라도 타지에 자리를 잡겠다는 아들이라니. 막연히 여행으로 왔던 이미지와 실제로 살기 시작하면 겪어야 할 도시의 이미지가 차이가 많이 날까 봐 더럭 겁도 났었다. 그런데 별 문제없었다. 임대료가 서울보다 낮은 것도 큰 매력이었다. 외식업은 어디든 포화상태지만 서울보다 이 곳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음, 저는 일단 내가 잘하는 거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게 첫 번째라고 생각을 했고요, 그다음에 내가 잘하는 것이 결국에는 나의 즐거움이니까 이 즐거움을 누군가가 함께 해준다라는 게 가장 큰 어떤 저한테는 기쁨이고 철학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재미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재밌는 사람들과 재밌게 살아가고 싶다 라는 게 제 인생의 모토라고 생각합니다.
연결, 연결을 시키고 싶은 거죠. 연결되기 위해서 저는 계속 디깅을 하는 거죠. 그런 사람을 찾아 나서고, 그런 사람들이 이 공간에 왔을 때 이런 사람들도 있다고 제가 계속 데이터를 축적해서 그 사람들에게 먼데이 오프 플리즈라는 공간이 후에 실망스럽지 않은, 굉장히 즐거운 공간으로 꾸준히 연결되는 거."
일등이냐 아니냐는 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무언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이 있느냐는 쪽이다. 그 편에서 그는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피자 맛에 한해서는 전국에 내놓아도 밀릴 게 없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그에게 성공의 개념은 일반적인 의미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곳을 위해 무엇인가 공헌할 수 있는 스스로의 역할이 있는 것. 그에게 정착의 중요한 요소는 그래서 사실 장소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음에 문제에 가까워 보였다.
"태어난 곳이 꼭 고향일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가 어디에 정착을 하고 내 마음이 어디에 있냐가 훨씬 더 중요한 거지. 그게 마음의 고향이라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닌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곳. 앞으로 내가 터를 잡을 곳. 그게 내 고향이죠... 결국에는 내가 어디에 정착을 해서 내 프라이드가 어느 곳에 있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만약에 내가 예를 들어 광주에서 살다가 서울을 가거나 제주도를 가더라도 내 마음이 광주에 있다고 한다면 그게 곧 내 고향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반면에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탈리안 셰프 김용인 씨와 무등산 브루어리를 운영하고 있는 윤현석 대표에게 광주란 자신과 도시의 강점을 최대한을 끌어올릴 수 있는 유리한 홈그라운드다. 궁중요리전문가인 어머님의 영향을 받아 전라도 식자재에 관심이 많은 김용인 씨는 이탈리안 조리법으로 전라도의 풍부한 식자재를 요리한다. 최종적으로는 로컬 푸드를 이용한 한식에 도전하고 싶어서 차근히 준비 중인 그에게 이 도시는 든든한 자산이다.
광주에서 많이 생산되는 밀에 주목한 윤현석 대표는 로컬 맥주 제조를 실험 중이다. 도시의 상징 무등산을 모티브로 한 브랜드 로고가 말해주듯이 광주의 유형무형 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상품들도 개발하고 있다.
광주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어드밴티지가 돼요. 다른 도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잖아요. 내가 사는 곳의 장소성을 기반으로 일과 공간을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로컬 엑셀레이팅이라고 지역의 청년들을 발굴해서 창업을 키워주는 일도 하고 있고. 지금은 지역에서 나는 밀보리(광주는 밀 재배로 유명하다)를 이용해서 맥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양조를 하는 거죠.
이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자산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도시를 떠날 이유가 없다. 도시와 개인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의 기억들과 유 무형의 자산들이 그들의 자원이 된다. 도시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아직 발견하지 않아 묻혀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짧은 기간 동안 알아챌 수 없는, 오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사람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가치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지역에만 머문다면 놓치기 쉬운 트렌드나 각 종 인사이트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디깅 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전국을, 필요하면 전 세계를 서칭하고 찾아가며 새로운 기술과 필요한 정보를 얻는다. 이런 시대에 지역은 핸디캡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한 배경이 된다. 블루보틀은 샌프란시스코 출신 두 청년들의 창고에서, 나이키는 포틀랜드의 지역 대학강사가 만들어낸 운동화에서부터 시작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윤현석입니다 보다 광주에서 로컬 맥주를 양조하는 윤현석이라는 타이틀이 더 근사하게 들리는 시대 아닌가. 킨포크 간지로(잘 모름).
이 곳이 답답해 여행자의 삶을 살던 사람도 있다. 페드로로 더 유명한 김현석 씨다. 쌍촌동에서 여행자들을 위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그의 공간 보야져스는 광주 최초 외국인 전용 게스트하우스다. 호텔리어가 꿈이었던 그는 서울 대학 진학을 생각했지만 결국 광주에 남게 되었다. 서울에 비해 보수적인 색채, 재밌는 게 별로 없는 조용한 도시라는 생각에 여행을 시작했다. 이곳에는 없는, 뭔가 짜릿하고 매혹적인 것들이 많을 거라고 믿었고 실제로 무척 즐거웠다. 40여 개 국을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것들에 마음을 뺏겼다. 그 수많은 경험을 통해 페드로는 성장했다. 돌아온 도시는 이전과 달랐다.
왜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외국 나가서 하면 (같은 경험들도) 더 재밌고 한 걸까? 다른 걸 좀 해봐야겠다 했던 게 게스트하우스였어요.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여행자들이 광주를 찾아왔다. 그게 신기해서 매번 물었다고 한다.
'광주에는 왜 온 거예요?'
대답은 다채로웠다. 영화 <택시 운전사>를 보고,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양림동 선교사였던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서, 야구를 좋아해서, 아시아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비엔날레와 아시아 문화전당을 보러, 아시아 민주화 운동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여겨지는 5.18 민주화 운동의 도시라서.
40여 개국으로 떠났던 그의 긴 여정은 광주로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밖으로 향했던 그의 시선은 이제 유연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훑고 있다. 게하를 운영하는 틈틈이 요가를 하며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내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주말이면 가게를 닫고 근교의 바다와 산을 탐험한다. 작은 의자(캠핑의자가 아니라 정말 응접실에서 사용할 법한 목각 의자다. 이걸 봉고차 트렁크에 넣어서 길을 떠난다) 두 개와 테이블, 그리고 커피포트를 챙겨 차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부터 차박을 했다. 큰 마음을 먹고 마련한 카약으로 도시를 둘러 도는 강을 건너기도 한다. 그에게는 이 도시에서 그가 멈추는 모든 장소가 여행지이자 정착지다. 이 근사한 여정의 일차 종착지는 그의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동네에 요가센터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김동규 씨에게 광주는 기꺼이 싸울 가치가 있는 장소다.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5.18의 기억들을 공유했다. 5.18 희생자들의 사진을 모욕하는 리플들을 보고 충격받은 그는 점차 사라지는 도시의 기억을 다음 세대로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그는 청년,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5.18 민주화 운동을 알릴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고민했다. 전시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날의 이슈로 다룰 것.
페이스북 페이지 <광주의 오월을 기억해주세요>를 7년째 운영하며 과거의 역사로서의 5.18이 아닌 오늘날의 5.18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그에게 5.18이란 아마도 깊은 슬픔이자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의 총체인 듯했다. 패배와 죽음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최후까지 도청 안에 남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는 이 질문을 통해 5.18을 기억한다. 그들이 마지막 날 도청에 남았던 이유는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내일의 세상을 누군가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5.18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오늘날 누군가가 이어받아야 할 현재 진행형의 상태로 이해된다. 비극을 넘어 시민들의 긍지이자 이어나가야 할 긍정의 가치다.
이 사회의 가장 진보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어떤 일이 있었을 때 가장 앞선 의견을 표명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설득을 할 수 있는, 지난 40년 동안 광주만이 할 수 있었던 역할 덕분에 지금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이렇게 발전하고 진보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도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고 지금까지도 살아왔고.
홍콩사태가 터졌을 때 가장 빠르게 움직인 주체 역시 그와 뜻을 함께하는 지역의 청년들이었다. 홍콩에서 광주를 발견한 청년들은 연대에 주저하지 않았다. 관련 집회나 행사의 장소 대여가 빈번히 취소되고 대자보가 훼손되면서도 이들은 기금을 모으고 홍콩 활동가들과 어깨를 걸었다.
그런 그에게 지역사회의 문제는 중요한 이슈다. 민주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지닌 내부 모순을 모른 척 넘기기에는 그는 이 도시를 너무 사랑한다. 최근 그는 지역 사학재단의 비리를 고발하는 대자보를 썼다는 이유로 재단 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그의 기사는 지역 사학 재단의 문제를 전국 이슈로 부상시켰다. 소송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숫자 너머로 마주한 청년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결이 되어 하나의 도시를 직조해내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생을 이렇게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도시의 색이라니. 진짜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도시의 일상이 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비극의 도시, 민주화의 성지, 낙후된 곳, 정치색이 강한 도시, 차별의 땅, 맛의 고장, 예향의 도시. 광주를 흔히 설명하는 수식어로는 채 담아내지 못해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도시의 여분이, 진짜 오늘의 도시가 지금 이렇게 반짝인다.
누군가가 무엇을 사랑하는 모습은 위로가 되기 마련이다. 무엇인가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완벽히 공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왜인지 응원을 하게 된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드물게 발견되는 성실한 사람들. 자격지심도 없고 허세도 없이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들을 이해하고 천천히 자신의 삶을 통해 가꾸고 지켜내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는 그런 힘이 있다. 이 청년들의 이야기도 분명 어딘가 가닿았을 거라고, 분명 작은 위로가 됐을 거라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동안 어딘지 충만한 기분이었다.
태풍 피해로 난리가 나는 논밭,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는 장소, 힐링하러 가는 정이 넘치는 곳, 맛집이 많은 좋은 여행지로 소개되는 지역. 중앙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지역은 파편만 있다. 군데군데 조각나고 부러진 모습. 그 지역에서 사람이 산다. 화면에 잡히지 않는 나머지 공간에서. 도피하는 것도, 어쩔 수 없어서 매여있는 것도 아닌,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보통의 존재들이 이 도시의 내일을 직조해간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유로 설명이 충분하다.
매체에서 보도되는 지역은 수많은 문제가 산적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채워내며 살아가는 이 치열한 누군가 덕분에 도시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고 지역은 황폐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고 자신의 꿈을 키울 기반을 마련하고 멀찍이 떨어진 별 같은 서로의 존재를 이어가면서 생은 이어지고 도시는 살아남는다.
지금 여기, 당신이 있는 그곳을 사랑하는 한.
친애하는 나의 도시.
친애하는 나의 도시 광주편 다시보기 링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