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OR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lblue Jan 13. 2021

우당탕탕 공동 제작기

광주, 여수 그리고 경남  


조금 다른 방식으로 공동제작을 해보자고 했다.

대체로 지역사의 공동제작은 하나의 큰 주제만 정해지면 나머지 시리즈는 각 사마다 별도의 프로젝트처럼 진행된다. 아이템의 내용을 공유하고 자막 폰트나 영상의 톤을 맞추는 정도가 일반적이다.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보자고 이야기했다.


공동제작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3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별개의 사에서 함께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시리즈 물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인가?


2. 하나의 톤을 유지하며 프로그램마다 이질감을 줄인다.


3. 지역 청년들의 이야기가 가장 깊은 메시지다.


수많은 매체들이 범람하면서 방송사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있다.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사가 되든지 영상들이 모여드는 플랫폼이 되든지. 이미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는 제작사의 길을 갈 수밖에 없지 않나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플랫폼을 유지하기에는 치러야 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사랑방신문>처럼 작고 탄탄하게 내실을 다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영상제작에 필요한 자원을 생각해보면 방송사로서는 그 역시 쉽지 않다. 그렇다면 문제는 제작력이다.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공익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것 외에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느냐는 문제.


시청자들의 취향이 변화무쌍하게 이동하면서 시사교양 PD들의 위기감은 커져간다. 재미가 없으면 보질 않기 때문에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좋은 프로그램들도 고전을 면치 못한다. <거리의 만찬>이 첫 선을 보였을 때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 논란이 일면서 여러 이유가 거론됐지만 아무래도 시청률 때문이 아닐까 멀리서 그렇게 유추했었다(심지어 이 프로그램은 재미도 있었는데) 들이는 공력에 비해 시청률이 낮다. 지역사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역방송이 서울방송을 막는다는 항의도 이제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다른 채널로 보면 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기획에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대주제를 정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는 것 외에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세계관을 짜 보자. 어설프더라도.


메인 작가가 합류하면서 불필요하게 거창했던 게스트하우스를 직접 청년들이 운영한다는 콘셉트를 쳐냈다. 시간과 비용의 문제가 컸지만 세계관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윤식당>이 아니니까. 대신 도시를 중심에 두고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을 여행자가 탐험하는 세계를 러프하게 그려냈다. 하나의 도시로는 약하니까 세 개의 도시. 그것도 잘 알려진 관광지 말고. 여행지로는 다소 의아한 세 장소를.

광주, 순천 그리고 진주.


세계관이 정리되면 이제 톤의 문제가 남는다. 그동안 각사별로 진행돼온 공동제작 방식으로는 일정한 톤을 담보할 수가 없다. 대주제는 하나인데 각 편마다 하나의 시리즈로 잘 느껴지지 않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PD들의 개성이 드러난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철저히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장점이라기보다 단점에 가깝다.


대체로 서울 방송사의 프로그램들은 이런 톤 앤 매너 유지를 잘한다. CP와 메인 작가가 주도하는 제작 시스템이 확고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어떤 연출 PD가 들고 나더라도 프로그램의 톤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반면 지역 사는 한 명의 PD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쳐내면서 제작을 한다. 캠페인이든 다큐멘터리든, 특집 토론이든 쇼 프로그램 중계 녹화든 (그리고 발레까지) 수시로 발생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면서 동시에 다른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대체로 하나의 프로그램에 한 명 이상의 PD를 차출하지 않는다. 회사 입장에서는 한 명의 PD가 여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게 효율적이다. 두 명 세 명을 팀으로 묶어 두면 빼서 쓰기도 애매하고.


개인적으로는 이게 심각하게 후배들을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선후배 간에 협업하는 제작 과정은 그 자체로 교육이다. 그리고 그게 제작 시스템이 된다. 한 명의 PD가 교체되더라도 프로그램에는 타격이 없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무임승차자가 없는 팀의 경우) 프로그램의 퀄리티도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질보다는 양이 중요한 지역 상황에서도 결국 퀄리티가 낮아질수록 미래는 없다. 당장의 오늘을 해결하기 위해 미래를 저당 잡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반드시 이번 공동제작은 톤 앤 매너를 맞춰야 했다. 세명의 (비교적_눈물 닦고_젊은) PD들이 전과는 다르게 해 보자고 모였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을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수없이 반복된 관광 프로그램, 다시 말해 맛집이나 지역 행사를 소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에 사는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이야기를 하자는 거였다. 그것도 그동안 지역 매체에서조차 만나보기 어려웠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기로. 왜냐하면 우리는 (비교적_눈물 닦고_젊은) 지역 PD들이었기 때문에. PD의 생애에도 주기가 있다. 10년 차 내외의 PD들이 모였으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고. 언제 또 우리가 이렇게 모일 수 있겠어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서울도 다를 바가 없겠지만 지상파 자체가 노쇠한 매체다. 주 시청층이 노년층이기 때문에, 또 규제가 엄격하기 때문에 비교적 보수적인 색채를 띤다. 청년들에게는 아무래도 마이크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지역도 마찬가지다. 지역 학자, 병원장, 정치인 때로는 생활정보의 달인들은 종종 출연을 해도 지역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많지 않다. 기행을 하거나 특이한 스펙을 가지고 있거나 사건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한 그들은 있어도 없는 존재들에 가깝다. 그런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게 프로그램의 주요 목적으로 정리됐다. 왜냐면 우린 (비교적_..).


기획에서 주안점이 정리되면 방법론이 해결된다.  

방법적인 측면에서 원칙은 다음 네 가지다.


1. 기획회의를 (엄청나게) 자주 한다.


2. 3편 모두 제작 현장에 반드시(라고 쓰고 가능하면이라고 읽는다) 모든 PD들이 참여한다.


3. 시사를 함께 한다.


4. 지역 청년들을 심층 인터뷰한다.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 크게 한 번 이후 두세 번 만나는 기획회의를 더 자주 했다. 적당히 모이기 좋은 목포에서 첫 기획회의를 했었다. 기획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만큼 PD들의 관여도도 커진다. 각자 한편씩 만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시리즈 물이라는 인식도 잦은 접촉을 통해 만들어진다. 의식적으로 자주 만나고 (그래 봤자 대 여섯 번이었을 것 같은데 아무튼) 수시로 연락하면서 가까운 상태를 유지했다. 어떤 일이든 반드시 각 연출들을 통해 일이 진행되도록 작은 일도 모두 함께 공유했다. 서로 성가실 정도로. 제작 지원에 응모한 기획안 작성부터 예산안, 각 도시의 정보와 촬영 구성안을 공유해서 제작 프로세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는지를 상호 참조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2번이었다. 반드시 모든 촬영 제작 현장에 모든 PD들이 참여했다. 각자가 맡은 도시에서의 촬영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촬영 시스템부터 후반 작업 시스템까지 모두 공유할 수 있도록 모든 현장에 함께 참여했다. 전술했듯이 수시로 다른 작업들을 쳐내야 해서 때로는 불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모든 프로세스를 함께 했고 촬영 현장에서는 각 도시의 메인 PD를 중심에 두고 부분 연출을 나누는 등 각자의 롤을 조금씩 수행했다.


이런 참여는 실제로 구체적인 연출 부분을 나눠 던다는 장점 외에도 전반적인 프로그램의 톤 앤 매너를 익히고 전 도시에서의 촬영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좋은 기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매 편 제작이 후반으로 갈수록 시행착오는 줄어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친애하는 나의 도시>는 최대한 개별 PD들의 개성을 누르고 하나의 완결된 시리즈로서 세계관을 공유하는 상품을 만든다는 목적을 향했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이 상품으로써의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정 부분 의도한 방향에 있어서는 작은 성공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사 역시 함께 진행했다. 처음에 예상했듯이 밀리는 후반 작업 일정과 마감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헬한 시간들의 연속이었지만 급하게 핸드폰으로 부분을 찍어서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편집의 방향도 공유했다.


나스 서버를 이용해서 서로 편집에 필요한 (현장을 함께했기 때문에 대충 서로에게 어떤 그림이 있는지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상을 주고받고 편집한 부분들을 공유하면서 의견을 반영하고 (나보고 독재자랬어 너네들) 수정을 거듭하면서 세 편의 완결성을 높이고 하나의 시리즈로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야 했기 때문에 기존에 하던 방식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사전 인터뷰에 투자했다. 방송에는 출연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지역 청년들을 만나 '이도시의 몇 시를 좋아하나요?'같은 희한한 질문부터 5.18이나 도시 재생에 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정리해서 기획에 반영했다. 비록 도시를 여행한다는 가벼운 콘셉트 때문에 많은 부분 삭제된 이야기들이 많지만 언젠가는 다시 청년들의 목소리를 담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 <친애하는 나의 도시>가 만일 다른 도시를 다루는 프로그램에 비해 어떤 미덕이 있다면 아마도 이 부분 덕분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제작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것이 토크쇼가 되었든 시사 프로그램이 되었든 예능이 되었든 분명한 것은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으로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그들의 시간을 사로잡기 어렵다. 프로그램에도 세계관이 있고 의미만이 아니라 보는 즐거움이 있을 때에 비로소 경쟁력이 생긴다. 문제는 지역 방송사의 경우 언제나 인력과 재원 부족에 허덕인다는 데 있다. 투자할 돈도 사람도 없다. 있는 건 유일하게 하나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제작은 좋은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 명의 PD가 3개의 시리즈를 만드는 게 아니라 3명의 PD가 나눠서 제작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숨을 돌리게 한다. 돈 벌어다 주는 다른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이런 방식으로는 퀄이 담보될 수 있는 시리즈 물 제작이 가능하다. 어쩌면 신입 사원조차 명이 끊긴 지역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특히 지역사간에 교류가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 MBC의 경우는 굉장한 강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활용을 충분히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아직 제작력 있는 PD들이 있을 때 함께 해야 한다는 거다.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음을 매 해 느낀다. 새로운 방식의 제작 시스템을 익히는 것도 서로 간의 이견을 좁히는 것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해내면서 서서히 익숙해진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얼마 남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기 때문에 이견이 많을 수밖에 없고 배가 산으로 가기도 한다. 그 모난 부분들을 깎아내고 하나의 목적으로 달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인내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 지난한 과정을 함께 해야만 다음이 있다.

   


2020년에는 이런 방식으로 공동제작을 했다.

세명의 (비교적_눈물 닦고_젊은) 지역사 PD들이 함께.

이 중 한 녀석은 방송일에 장가를 갔다. 축하하고 많이 미안했다.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공유해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휘갈겨쓴다. 쓰고 나니 별 게 없네.


모두 수고했습니다.

2021년에는 더 행복하길.

광주에서.


<친애하는 나의 도시> 다시보기 링크

광주편

https://youtu.be/PFcYHM7dSBY

순천편

https://youtu.be/JAaIv3_Ap_4​​

진주편

https://youtu.be/4o5nzTouuGE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 여기, 당신이 있는 그곳. 친애하는 나의 도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