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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Feb 12. 2021

친애하는 나의 도시로 초대합니다.

미디어 오늘 기고글


"혹시 방송에서 청년들 본 적 있어?"

지상파 방송의 주 소비계층은 중장년 혹은 노년층이다. 청년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지역도 상황은 비슷하다. 문득 지역에 살고 있는 청년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졌다. 광주MBC, 여수MBC, MBC경남 공동제작 프로그램 <친애하는 나의 도시>는 그렇게 시작됐다. <친애하는 나의 도시>는 지역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 자신의 도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단 한 명의 게스트를 도시에 초대하고 지역 청년들이 설계한 루트를 통해 지역의 내밀한 일상을 공유한다.

지역 방송사는 지역성에 천착한다. 지역성은 지역방송사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방송평가 항목에서도 지역성 지수가 등장한다. 지역성 지수가 높을수록 좋은 방송사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지역성'의 정체는 모호하다. 무엇이 지역성인가?

물리적 지역성이라는 한계를 넘어 지역성이 지닌 가능성의 의미를 확장하다

대체로 지역성은 물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지역 일들을 프로그램에 담는 것. 그러나 문제는 물리적 지역성에만 신경 쓰다 보면 정작 중요한 가치들을 놓친다는 데 있다. 단순히 지역에 있는 어느 장소를 촬영했다고 의미가 자동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이나 사건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지역성을 담보한 사건이 되지 않는다. 지역 사람이 출연했다고 지역성이 담보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지역성은 물리적인 개념보다는 사실 어떤 정신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지역의 자원을 이용한다. 아름다운 고택이나 한적한 시골길, 심지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그러나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누군가가 잠시 들러서 지나가는 곳, 지친 일상을 피해 아름다운 풍광 속으로 숨어드는 장소, 맛 집이 많아 놀러 가기 좋은 여행지나 사건 사고나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나 만날 수 있는 피상적인 장소로서 지역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일상의 장소로서 지역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오늘을 만나고 싶었다.

유명하거나 특이한 사람들이 아니라 고개를 돌리면 만날 수 있는 가장 보통의 존재들. 될 수 있으면 그동안 방송에 출연했던 사람들 이외의 분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오히려 방송에 담기지 않을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카메라 없이 청년들을 만나고 다소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바라본 이들의 도시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도시와는 결이 많이 달랐다. 지역성에 대한 생각도.

"태어난 곳이 꼭 고향일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가 어디에 정착을 하고 내 마음이 어디에 있냐가 훨씬 더 중요한 거지. 그게 마음의 고향이라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닌가.. 결국에는 내가 어디에 정착을 해서 내 프라이드가 어느 곳에 있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들에게 지역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획일화된 중앙에 대한 대안의 방식이자 가능성의 공간이다. 지역에서 태어났든 타 지역에서 이주해왔든 지리적 개념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 지역을 사랑하고 이곳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점이다.

지역사가 지켜야 할 가치인 '지역성'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 대부분의 중앙 방송이 놓치고 있는 지역이 지닌 잠재력과 대안의 가능성을 끝없이 확장하고 연결시키는 것, 효율의 논리 속에서 쉽게 배제되기 쉬운 존재들과 가치들을 소중히 담아내는 것. 그럼으로써 언제나 더 나은 길이 있음을 알리는 것. 그게 지역성 구현의 핵심이 아닐까? <친애하는 나의 도시>에서는 그런 지역성을 담아내고 싶었다. 이런 작업은 오랜 시간 동안 지역을 담아왔던 지역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역성을 지키면서도 경쟁력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방식 '공동제작'

수많은 매체들이 범람하면서 방송사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있다.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는 제작사가 되든지 영상들이 모여드는 플랫폼이 되든지. 이미 오래전부터 개인적으로는 지역사는 제작사의 길을 갈 수밖에 없지 않나란 생각을 하고 있다. 플랫폼을 유지하기에는 치러야 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제작력이다. 매력적인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지역성을 담아내는 것 외에 사람들이 즐겁게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느냐는 문제.

<친애하는 나의 도시>가 내용만큼 신경 썼던 부분은 바로 제작 방식이었다. 이례적으로 광주, 여수, 경남 3사의 비교적 젊은 PD들이 모였다. 기왕이면 그동안 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동제작을 해보자고 했다.

대개 지역사간 공동제작은 하나의 큰 주제만 정해지면 나머지 시리즈는 각 사마다 별도의 프로젝트처럼 진행된다. 아이템의 내용을 공유하고 자막 폰트를 맞추는 정도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기존의 공동제작 방식으로는 하나의 톤을 담보할 수가 없다. 대주제는 하나인데 각 편마다 하나의 시리즈로 느껴지지 않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PD들의 개성이 드러난다는 것이 장점이지만 철저히 시청자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것은 장점이라기보다 단점에 가깝다.

그래서 <친애하는 나의 도시>는 3사 제작진이 모여 말하자면 '스튜디오 드래곤'같은 작은 제작사를 차렸다. 프로젝트만을 위한 세포 단위 유연한 조직으로 각자가 맡은 도시에서의 촬영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기획부터 촬영 편집,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 진행했다. 이런 방식으로 <친애하는 나의 도시>는 최대한 개별 PD들의 개성을 누르고 하나의 완결된 콘텐츠 시리즈를 만든다는 목적을 향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버티면서 진격할 가치가 있는 순간들이었다. 우리는 함께하며 서로 많은 것들을 배웠다.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테스트베드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제작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한다. 의미만이 아니라 보는 즐거움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경쟁력이 생긴다. 문제는 지역 방송사의 경우 언제나 인력과 재원 부족에 허덕인다는 데 있다. 투자할 돈도 사람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제작은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좋은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신입 사원조차 명이 끊긴 지역에서 유일하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특히 지역사간에 교류가 비교적 활발했던 지역 MBC의 경우는 굉장한 강점이 있다. 그런데 활용을 충분히 못하고 있다.

2012년 파업 당시 지역 방송사 내부에서 수많은 논의들을 했다. 혁신을 위한 크고 작은 토론회나 스터디도 열었다. 그런데 그런 논의들이 지금 현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자문하고 싶다. 하루가 다르게 미디어 산업이 급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제작력 있는 지역 PD들이 있을 때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 지난한 과정을 함께 해내야만 다음이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얼마 남지 않았다.

<친애하는 나의 도시>는 이런 절박한 갈증에서 시작된 작은 시도였다. 지역사가 지닌 강점을 찾고 새로운 제작 방식들을 과감히 시도해야 한다. 부디 이 작은 프로그램의 성취가 다른 변화의 시발점이 되길 기원한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6/0000106564?fbclid=IwAR2oFf2ShzHLC4l9sQ8swnD2QPXmA7NYpS9X7ylhBOL_kO6LVLm2HadrA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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