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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Sep 04. 2024

응원의 힘

빅토리

오랜 시간 동안 강백호에 대해서 쓰려다 말고 쓰려다 말곤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도 글은 시작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이것저것 뒤엉켜서 좀처럼 활자의 형태로 나타나질 않는다. 오늘은 슬램덩크가 아니라 좀 다른 영화를 빌려서 하고 싶었던 말들 중 일부를 정리하고 싶다. 응원의 힘이라는 것. 아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다.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지역대학은 예외 없이 지잡대로 통하는 세상에서 운이 좋게도 별생각 없이 컸다. 어릴 때부터 상당히 둔한 편이었고 또래들보다 성장도 더뎠다. 그래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발산하는 신호에도 상당히 둔감했다. 그래. 난 머리가 꽃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족함때문에 성공과 실패, 경쟁과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고 그랬기에 사회적 시선을 아주 늦게 감지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진학한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지역에 대한 시각을 배웠다. 그것도 상당히 뒤틀린. 너는 다 좋은데 전라도 사람이라 내 부모님께 소개하기는 어려울걸. 아무 관심도 없는 어느 선배가 느닷없는 소리를 했다. 이유를 물으니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우면서 컸다고 했다. 이상한 일인 걸. 그런데 머지않아 또 다른 사람에게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 아 이건 우연이 아니라는 거지.


지역에서 자란 사람은 지역을 바라보는 시선을 잘 모른다. 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밖으로 나오고서야 알았다. 지역-전라도-여성. 이 삼박자가 어떻게 내 사회적 위치를 지정하는 지를. 느린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지역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제작일을 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최종까지 갔다가 탈락하기도 하고 서류전형조차도 통과하지 못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왔다. 떠났던 곳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이 다시 보였다. 떠나 있던 시간 동안 습득한 정보와 기존에 존재하던 지역의 상이 하나로 겹쳐지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수많은 지역의 친구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떠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지역에 남은 사람들은 한 줌 손에 들어올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곳은 머물고 싶어도 일할 기회가 적었고 무엇보다 서울로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을 뭐랄까, 그래 굉장히 작게 보더라고.


서울 방송국에서 만난 어느 PD가 물었다. 서울에서 떨어져서 지역 내려간 거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 회로가 조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죠. 하고 말았는데 그 이후에도 종종 그 순간이 생각난다. 그 짧은 대화 안에 촘촘히 적체되어 있는 무언의 구조가 무겁게 느껴져서.


지역에서 일을 시작하고 방송 직종에서 일하고 싶다는 지역 후배들을 만나는 자리가 가끔 생겼다. 지역 대학에서 교수들이 학과의 학생들을 위해 방송국에 견학을 보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자리 사업으로 잠시지만 함께 일하기도 하면서 마주한 지역의 아이들은 가끔 진로나 직종에 대한 질문들을 하곤 했다. 하지만 별생각 없이 도움이 필요하면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대화는 머지않아 미묘한 벽에 마주치곤 했다. 그건 바로 기대 없음이라는 문제였다.


종종 응원의 힘을 목격하고는 한다. 아무것도 아닌데 잘했다고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하기만 해도 사람들은 눈을 반짝인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수고로운 일도 아니다. 다만 말 뿐이라도 응원은 사람에게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런 기대 속에서 줄곧 성장해 온 사람들을 몇몇 알고 있다. 주로 집안의 장남이나 공부를 아주 잘하는 상위권 학생들이 그 안에 속한다. 둔한 나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창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차별을 기민하게 감지하곤 했다. 아주 오래전 동창회 같은 모임에서 어느 학생에게는 인사를 받고 어느 학생은 무시하던 한 선생을 욕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그랬잖아. 시니컬하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니었냐며 되려 의아해하던 그 아이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응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이들이 가장 증오했던 것은 체벌이 아니라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지역에 남은 학생들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아니 지역에 남기 이전에, 지역에서 성장하면서도 기대를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다. 특별히 성적이 좋거나 천재적인 어떤 소질이 있지 않는 한.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아주 소수의 아이들만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거다.  적절한 기대와 응원을 제때 받으면 아이는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아이들에게 그런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그럭저럭 자란다. 대부분은 큰 관심 없이도. 뭐 대단한 일을 해낼 거 같지도 않고 갑작스러운 이변이 생겨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낼 거 같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아이들. 그런 기대 없음에 익숙한 아이들은 스스로에게도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라고 물으면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답들이 돌아온다.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가끔은 그 대답에 좀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다름 아닌 나 역시 비슷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무한한 잠재력이 타인들에 의해 발견되고 성장하고 마침내 눈부시게 발산하는 기적과도 같은 서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어딘 가에 소속되기를, 자신의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그 누구보다 강렬하게 원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사각에서 외롭게 방황하던 존재가 채소연에게 발견되고 그 재능을 알아본 안감독을 만나 세기의 라이벌 서태웅과 팀 동료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양한 다른 선수들을 마주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는 도무지 질리지가 않는다. 현실 속에서 그게 얼마나 드물고 소중한 경험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지역에서 일을 하다 관두고 서울로 이직한 동료들을 두고 회사 선배가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렇지 여기에 있기에는 좀 아깝지. 난 이 대화를 오래 생각하고 있다. 그런가.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깝지 않은 존재들인 것인가. 지역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또 남아서 생을 이어가는 존재들은 으레 그렇게 낮은 평가를 받는데 익숙해져 있다. 영화 빅토리에서 거제상고 축구팀이 그러하듯이.


'져도 된다.'


승패를 가르는 시합을 앞두고 거제상고 축구팀 감독 선생은 아이들에게 이기자가 아니라 져도 된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도 기대를 걸지 않는 지역 상고의 축구팀. 교장실 뒤로 걸려있는 유니폼과 깃발을 보면 언젠가는 강팀이었던 축구팀인 것 같은데도 감독은 선수들에게 져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스스로가 그 주문에 수긍을 한다. 이때 유일하게 납득하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서울 현대 중앙고에서 전학 온 김동현이다. 언제나 기대 속에서 살아왔으나 끝내 경쟁에 밀려 거제로 내려온 선수다.


'왜 져도 된다고 말합니까?'


당신은 어째서 우리에게 승리를 기대하지 않느냐고 그는 되묻는다. 상대가 너무 강하고 또 너희들은 그에 못 미치잖아라는 말을 내포하며 감독은 또다시 져도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미리 바운더리를 쳐버리고 아이들을 울타리 안으로 밀어 넣는다. 다시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불씨는 살아남기 어렵다. 지역은 그런 곳이다. 시초부터 그랬을 리는 없지만 서울과 지역 간의 격차가 가속화되면서 점차 이건 하나의 분위기가 됐다. 패배감. 공기 중에 침투해 있는 이 두꺼운 천장은 낮고 촘촘해서 도무지 무엇인가가 뜨겁게 연소할 수 없게 작동하곤 한다. 그러니까 어지간히 크고 강인한 불씨가 아니고서야 이 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다행히도 영화의 주인공 필선은 이례적으로 강력한 불씨를 품고 있는 여자다. 천상 리더의 잠재력을 가진 그녀는 친구 미나와 함께 내한테는 좁은 거제에서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살아남는다. 필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미나는 아들을 낳으려고 7 자매를 출산한 어머니를 대신해 장녀로서 6명의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태권도 관장이면서도 자신의 딸이 지닌 천부적인 재능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애써 억누르는 아버지를 가진 상미, 축구를 잘하는 오빠의 그늘에 가려진 서울 전학생 김세현 등 영화 빅토리의 주조 연들은 거제라는 지역 공간 자체가 지닌 한계 속에 응원이나 기대 없이 그저 홀로 자라난다.


이들에게도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응원들은 각자 축구 잘하는 오빠, 태권도장의 아마도 남자일 게 분명한 유망주인 누군가,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녀들의 당연한 몫은 그렇게 잘게 나뉘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땔감으로 사용된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가스라이팅 앞에 장사는 없다. 그렇게 작고 작게 축소되어 있는 그녀들의 마음속의 불씨를 필선은 자극한다. 마치 속살거리는 악마처럼. 댄서가 되고 싶다는 욕망으로 충만한 그녀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이루기 위해 돌진한다. 그리고 그 사이드 이펙트로 불씨를 간직한 주변의 여성들이 휩쓸려 들어간다. 필선이라는 태풍의 눈으로.


마음의 불씨란 전염성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쉽게 옮겨 붙기 마련이다. 더욱이 거제처럼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지역에서는. 한번 일기가 어렵지 서로를 발견한 불씨들은 거대한 화염이 된다. 필선의 주체적인 욕망에 자극받은 소녀들은 각자 깊이 간직한 불꽃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한다. 오빠 때문에 서울에서 반강제로 전학을 당한 세현은 특히나 가장 은밀하고 가장 뜨겁게 필선과 함께 불타오른다. 서울 태생의 전학생을 그리는 클리셰대로 세현은 굉장히 쿨하게 묘사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치어리딩에 대해 가장 뜨거운 열망을 품고 있는 캐릭터다. 그녀는 필선의 요구에 가장 쉽게 응하고 또 가장 쉽게 중도하차하지만 다시 또 쉽게 동아리에 재가입하고 가장 뜨겁게 무대 위에서 불타오른다. 세현의 도움 아래 밀레니엄 걸즈는 차곡히 그녀들의 욕망을 세상 앞에 전시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녀들을 응원하지 않더라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꿋꿋하고 씩씩하게.


영화는 스포츠 물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지만 그 이면으로 더 깊게 들어가면 이것은 영웅 성장담이기도 하다. 비범한 주인공이 동료들을 만나고 시련을 겪고 호적수를 만나 승리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해 내는 무협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필선과 미나는 초반부터 서부극의 주인공과 사이드 킥으로 짝으로 이뤄 등장한다. 악당들을 거리 하나를 두고 마주한 것처럼 오락실을 앞에 두고 길을 건너며 필선과 미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천명한다. 수백 번 뛰어서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으로 펌프 기계 위를 뛰며 필선은 말한다. 내한테 거제는 좁다. 대사 한마디로 인물의 그릇을 완벽히 표현하면서 영화는 필선을 중심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을 연결 짓는다. 거제의 주요 산업인 조선업 하청 노동자들과 거제에 뭐 볼 거 있냐는 서울 애들의 대사에서처럼, 무시받는 지역에서도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역의 딸들을, 언제나 지기만 하는 지역의 축구 선수들과 축구장에서도 보조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치어리더들을 한 번에 꿰어내면서 영화는 응원하고 응원받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역시 이 이야기의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지점은 아무도 자신들을 응원하지 않기에 소녀들은 스스로가 응원하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다시 영화를 되돌려보자. 필선의 밀레니엄 걸즈는 축구 선수들을, 학교를, 노동자들을 응원하지만 그녀들 자신은 어떠한 응원도 받지 못한다. 축구부의 승리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교장을 속여 어찌어찌 만들어진 치어리딩부는 그 이후에도 어떠한 지원이나 원조를 받지 못한다. 클리셰적인 설정이 가득하지만 그 흔한 응원하는 선생 한 명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보통 이런 류의 영화에는 사려 깊은 어른 한 명정도는 나타나서 물심양면으로 학생들의 꿈을 응원하기 마련인데도.


전체적인 영화의 톤은 거제를 아주 정감 있고 건강한 도시로 그려 넣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서늘한 사실은 지역의 여러 도시들이 그러하듯이 지역의, 그것도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여자학생들에게 지역사회가 거는 기대와 제공하는 지원이 거의 없다는 거다. 영화 속에서도 교장의 유일한 기대는 서울에서 전학 온 축구를 잘하는 김동현 학생이고 심지어 다른 선생들은 사실 그 김동현에게조차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지역의 대부분 학생들이 그러하듯 소수의 재능 있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아이들은 이러한 적당한 무관심과 적당한 애정 속에 성장할 것이다. 현실에서처럼.


그러나 현실과는 달리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가 응원하는 존재가 된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알아봐 주거나 구원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을 직접 찾아내고 방법을 간구하고 동료를 찾아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전형적인 이 장르물이 그러하듯이 모두의 마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힙합을 하고 싶어서, 누군가는 이게 근사해 보여서, 누군가는 정말로 축구부를 응원하고 싶어서, 누군가는 단지 함께 속해있고 싶어서. 각기 다른 동기와 욕망을 가지고 아이들은 하나의 팀이 된다. 세상이 응원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포기하지 않고 밀레니엄 걸즈는 닫힌 문들을 활짝 열어젖힌다. 하면 되잖아.라는 정도의 가벼움과 시작한 것은 끝을 내겠다는 정도의 무거움을 함께 짊어지고.


그러나 나는 역시 이 모든 과정은 필선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이때 중요한 사실은 필선에게는 좋은 아버지인 용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필선이 자신 안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추용우 덕분일 것이다. 뭐가 그리 겁나는데라고 당돌하게 묻던 필선에게 용우는 갑자기 상경한 딸이 말도 없이 돌아와도 조용히 밥을 챙겨주며 딸이 좋아하는 총각김치를 상비해 두는 아버지다. 하청업체를 관리하며 회사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가 필선의 보호자로서는 오랜 시간 거침없는 딸의 기질과 성정을 부러지지 않도록 돌봐왔음을 영화를 보는 내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어머니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두 부녀의 살림살이. 느닷없이 돌아온 딸 앞에서 네가 태어났을 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고 울먹이며 고백할 수 있는 아버지라니. 분명 필선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분명하게 찾아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전력으로 세상에 부딪힐 수 있는 용기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역시 누군가를 응원하는 존재는 응원받으면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니까.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아이를 성장시키는 것은 기대와 응원이다. 지역의 어린 여자아이. 이러나저러나 작게 취급받기 쉬운 세상으로부터 용우는 필선을 지켜낸다. 크지 않은 기대지만 지속적이고 꾸준한 사랑은 꽤 두꺼운 방패가 될 수 있으니까. 용우가 지켜낸 울타리 안에서 필선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역의 여성으로 살아남는다. 학교에서 아무리 공부 못하는 날라리라고 후려쳐짐을 당해도 좀처럼 기죽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세상의 기준을 재평가하는 필선은 살아남은 불씨를 사방팔방으로 흩뿌려놓는다.


니랑 있으면 조연은 된 거 같아서 좋았다.

니는 언제나 주연이데이.


스스로를 보조적인 역할로 자꾸만 위축시키려 드는 동료들을 필선은 응원한다. 언제나 깍두기였다고 자조하는 소희에게는 그건 사람들이 너와 있기 위한 핑계라고, 사이트 킥을 자처하는 미나에게는 너는 언제나 주인공임을 잊지 말라고, 그 누구보다 치어리딩을 사랑하는 세현에게는 오빠의 그늘을 박살 내버리라고 필선은 아이들을 부추기고 바람을 넣고 일으켜 세운다. 이것이 응원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넌 그럭저럭이니까 더 잘하는 누군가 뒤로 물러나렴. 아무래도 오빠가 더 중요하지 않겠니. 넌 장녀니까 동생들한테 양보하는 게 좋겠어. 백댄서는 가수 뒤에 서는 게 맞지 않을까.


필선은 이런저런 이유로 존재를 위축시키는 모든 논리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내는 걸그룹이 아니라 댄서가 될 거다.


축구장에서 치어리더가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듯이 백댄서 역시 걸그룹의 보조가 아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무엇의 보조일리가 없다고 필선은 말한다. 모두는 각자의 인생에서 주인공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망각한다. 간호사는 의사의 보조, 아내는 남편의 보조, 치어리더는 선수들의 보조, 딸들은 남자형제의 보조처럼 여겨지는 착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쉽게 위계 속에 존재의 위치를 정하고 경쟁 속에 서열을 나눈다. 각각의 고유한 영역과 가치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서울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로.


각자의 생에는 각자의 의미가 있다. 각자의 공간도, 각자의 시간도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치어리딩인 거다.


영화에서도 언급되듯이 존홉킨스 어쩌고의 연구에 의하면 응원받는 존재들은 90% 이상의 성장률을 보인다고 한다. 태어난 곳, 각자가 보유한 재능과 자질을 떠나 응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생이라는 질료 자체가 지닌 빛나는 가능성의 크기는 그 세계의 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절대로 예단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시간과 공간이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 안에 살아있는 불씨들을 키워낼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삶은 폭죽처럼 눈부시게 타오를 수 있다. 빅토리의 마지막 장면이 소녀들의 머리 위로 터져나가는 불꽃놀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응원받는 존재들이야말로 생의 가장 마지막까지 후회 없이 전소시킬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그렇게 응원받는 존재들이 다시 응원하는 존재들이 되었을 때 지역은, 여성은, 작은 존재들은 거대한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이렇게 수많은 존재들이 기대 속에 성장할 때야 비로소 세상의 모든 문들이 서로를 향해 활짝 열리고 우리는 주저하지 않는 용감함으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 경쟁과 압박, 끊임없는 비교와 위계를 만들어내는 세상 그거 난 잘 모르겠고,


내 꿈은 댄서라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응원이 필요한 거다. 강백호가 선수 생활을 접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전소할 각오가 섰듯이. 그 찰나를 위해 스스로가 후회 없이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도 겁이 나지 않는 용기의 근원에는 언제나 기대와 응원이 존재해 왔다.


필선이가 용우로부터 받았던 그것. 그리고 다시 필선이가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었던 바로 그것.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수고로운 일도 아니지만 지극한 애정과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응원이야말로 한 사람의 생과 더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따뜻한 마음이다.

p.s 빅토리 정말 좋은 영화다. 극장에서 내리기 전에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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