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를 안다는 착각
올해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두 편이었다. <존오브 인터레스트>와 <기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기타로의 탄생은 작품의 만듦새와 서사때문이었지만
<존오브 인터레스트>의 경우는 달랐다. 이 영화는 내게 영화 내적인 이유보다는 영화 외적인 이유로 오랜 잔상처럼 남아있다. 아직도 여전히 이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더 시간이 흘러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몇 글자 남겨두려 한다.
영화 적으로 <존오브 인터레스트>는 매우 시네마적이다. 개인적으로 나누는 지극히 사적이고 그렇기에 어떤 이론이나 비평과도 상관없는 실없는 분류긴 하지만 내게 영화가 시네마적이라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지닌 가능성을 매우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말이다.
매끈하게 빠진 상업영화는 천의무봉의 작업이다. 관객들이 편집의 이음새를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씬과 씬이 연결되고 이해하기 어려운 도약이나 비약 없이 서사는 차곡히 쌓여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그런 종류의 영화들이 만들어내는 광범위한 공감과 시청각적 쾌감을 나 역시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존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길로 향하지 않는다. 아마도 청각 장치의 효과를 가장 극대화하기 위한 긴 시간 동안의 검은 화면, 세련된 지옥도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사용하는 화면의 반전, 그리고 뜬금없이 삽입되는 매우 다큐적인 시퀀스까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최대한의 공감이나 감정적 동요를 목표로 하는 영화가 아니다.
실은 기억해 보자면 그 누구도 영화의 공식을 지정해두진 않았다. 영화의 역사가 긴 시간 동안 누적되면서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매끄러운 작법, 편집법, 시청각의 활용법 등이 노하우로 공유되면서 몇몇 기법들은 잘 만든 영화라면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 카테고리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누구도 강제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흥행데이터들이 쌓이고 자연히 혹은 의식적으로 장르와 형식이 만들어지면서 대체로 대형 흥행작들 안에는 공통의 성공 공식 같은 게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자면 시네마는 반드시 비주얼로만 표현해야한다는 법칙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주 긴 시간 동안 영상 없이 검은 화면 속에서도 시네마를 구현할 수 있는 거였다.
오랜 시간 다양한 영화를 보지 않았더니 이런 당연한 전제를 잊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영화 초반 화면 없이 겪은 그 청각적 경험에 나는 조금 놀라고 당황했었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었기때문에 준비되지 않았던 난 서서히 이 영화가 시각만이 아닌 청각적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급적 영화 정보는 미리 얻지 않고 가는 걸 추천하는 편이다. 이 쪽이 훨씬 즐겁다.)
거대한 벽 너머로 완벽히 차단된 홀로코스트처럼 조나단 글레이저는 의도적으로 영상을 화면에서 완전히 배제시켰지만 청각은 끊임없이 표백된 화면 안으로 침습해 들어온다. 이 지점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영상을 매우 남성적인 세계의 힘으로, 청각을 영상 세계를 지속적으로 탈환하려하는 여성의 전복성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자전적 다큐멘터리에서 경험했듯이 지난 세기동안 누적된 시네마의 역사는 주로 시선의 문제였고 그 시선의 주인은 언제나 남성주체였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영화감독은 대다수가 남성들이었고 여성의 피사체는 주로 관음의 대상, 살해당하는 피해자, 파멸의 존재, 성적인 위협 등의 위치로 고정되어 왔다. 그러나 청각만은 다르다. 기묘하게도 서부극과 같은 가장 남성적인 장르에서 조차도 어떤 음악들은 여성의 목소리로 시각을 전복시키거나 그러기 위한 시도를 지속한다. 죽은 자들, 살해된 자들, 억압된 자들, 착취당하는 자들. 영상에서 시선이란 곧 권력이고 화면에서 지워진 자들에게는 힘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유령이 되어 화면 밖에서 안으로 청각을 통해 다시 침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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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영화 <존오브 인터레스트>가 청각을 활용하는 방식은 시선을 통제함으로써 학살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창조하게 된다. 멋진 정원과 근사한 식기로 가득한 꿈의 집이 가리려 드는 추악한 살해의 현장이 그 아름다운 영상 안으로 침습해 들어오는 소리들로 인해 하부부터 스멀스멀 파괴되어 가는 광경이 상영시간 내내 펼쳐진다. 마치 빠져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늪으로 침전하는 듯한 감각.
이런 방식으로 <존오브 인터레스트>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간과 경계를 관객도 모르게 흐려놓는다. 끊임없이 오가는 파도에 휩쓸리는 해변가처럼, 완벽히 분리되지 않은 시각과 청각의 세계는 지속적으로 서로의 세계를 오가며 선을 흐려놓는다. 살해된 유대인들의 고급 의류나 식기를 캐나다에서 가져왔다는 은어로 은폐하고 음미하는 여주인도, 더 효율적으로 학살을 관리해 승진을 하려 드는 남주인과 동생을 건물에 가두고 즐거워하는 큰 아이까지 모든 가해자들 역시 거대한 폭력에 영향을 받는다. 그들의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두 세계는 나눠진 적이 없으므로. 마지막 시퀀스에서 회스는 독일인들로 가득한 파티장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이 많은 사람을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공학을. 그렇게 회스의 가족은, 그리고 아마도 학살에 연루된 모든 가해자들은 그 자신이 충실히 기능해 온 폭력의 세계 안으로 분리에 성공하지 못한 채 침윤되어 간다.
여러모로 인상적이었고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올해 가장 인상적인 영화로 꼽는 것은 사실 영화 내적인 이유는 아니다. 극장에서 나온 뒤 영화에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어딘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지만 사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꽤 봐왔기 때문에 청각의 활용이라는 지점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를 제외한다면 익숙히 접했던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평들이 쏟아지면서 당연히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한나 아렌트의 이 개념은 번역의 적합성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논의 되어 왔는데 평범성이란 단어가 그녀가 주목한 전제주의적 관료주의 체제 내에서 사유하지 않는 존재로 퇴화하는 악의 본질을 제대로 포착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상투어에 대한 고찰과 클리셰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유의 빈곤을 특징으로 하는 문제적 인간 유형의 등장 등은 평범성이라기보다 진부함으로 번역해 설명하는 게 적확하다는 주장들이 여기 저기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실은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최근 1년에 책을 800권을 읽을 수 있다 없다의 논쟁이 잠시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로 영화나 책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하여금 그것을 '경험'해봤거나 이해하고 있다는 착시를 줄 수 있다는 데 있다. 나도 모르게 극장을 나서며 홀로코스트를 충분히 이야기해 왔다고 느끼게 한 원인을 깊게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수많은 지면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악의 평범성을 나도 모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사실 <존오브 인터레스트>를 보게 된 이유는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이 어느 시상식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가자지구의 참상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을 접하지 않았다면 홀로코스트를 다뤘다는 '또 다른' 영화인 <존오브 인터레스트>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수많은 비평들을 보다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려 책상 앞에 앉고 나서야 조나단 글레이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떤 예술도 현실에서의 행위만큼 강하지 않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래서 조나단 글레이저의 (시간상으로는 후행이지만) 행위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 몇몇 영화와 몇몇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경험하고 이해한 것이 아닌 것처럼 영화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결국은, 끝내는 현실에 가닿아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순수한 사유와 독립된 예술의 힘을 믿지만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미를 발생시키는 순간은 현실에서의 행위와 연결될 때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을 모두 안다고 믿는 착시다. 실은 우리는 아니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파편화된 영상과 아티클, 몇몇 문헌과 사진만으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영화를 본 지는 꽤 됐지만 지금까지도 이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쑥불쑥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올해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인상적인 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