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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Jun 22. 2021

히어로는 세계를 구하지만 빌런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디즈니 빌런 서사의 진화 <크루엘라>

디즈니에는 절대적 금기 세 가지가 존재한다.


1.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때리지 않는다.

2. (사람은 죽어도) 동물은 죽이지 않는다.

3. 주인공은 살인을 살인으로 갚지 않는다.


<101마리 달마시안>의 악역 크루엘라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과연 디즈니에서 그리는 악역이 매혹적일 수 있을까 싶었다. 악역의 매력이란 어떤 한계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광기로부터 발광하기 마련이라. 디즈니의 안전한 세계관 속에서 빌런을 연기한다는 것은 그래서 아주 러블리한 의상을 입고 헤비메탈을 연주해보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어 근데 그것도 나름대로 멋있을지도) 아니면 허리에 타이어를 묶어두고 달려보라고 하는 거나. 애초에 불리한 판을 깔아 두고 매력 발산해보세요 하면 그거 하려는 사람은 스트레스받아 안 받아. 엄청 받지. 근데 그걸 엠마 스톤이 해냈다. 와우.


원작에서 크루엘라는 패션에 미친 여성이다. 아름다운 옷을 제작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서양에서는 살인만큼이나 금기시되는 개를 잡아 퍼 코트로 만들 생각을 한다. 디즈니 세계관에서는 악독한 중범죄자다. 감히 개를. 귀여운 댕댕이를. 그것도 101마리나 죽이려고!


커리어적으로는 천재적인 재능을 뽐내는 디자이너지만 금기를 건드린 대가는 차감없이 지불됐다. 유망한 디자이너의 말로는 결국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맞을 거야) 철창행이었다.


크루엘라는 이 악녀의 이야기다. 디즈니 빌런 역사상 가장 현대적으로 패셔너블하고 가장 세속적이며 어쩌면 가장 황당한 야심으로 (개털로 퍼 코트를 만들겠어!) 파국을 맞는 인물. 그녀의 이야기라니.


매혹의 빌런, 안전한 디즈니 세계관을 천재적 재능의 섬광으로 뚫고 나오다.


<크루엘라>는 매혹적인 빌런의 탄생기다. 지극히 안전한 디즈니의 세계관이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부신 재능을 날카롭게 휘두르며 예리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서사는 전적으로 그녀 자신이 지닌 재능에 대한 확신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사실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은 복수심이나 애정이라기보다 남루한 하녀복으로도 가려지지 않고 스스로 빛나는 재능 그 자체다. 나 이거 잘해. 그러니까 좀 해볼게.


자신이 지닌 재능을 겸손하게 감추거나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 디즈니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들과는 다른 지점 역시 이 부분이다. 아버지를 위하여 미래를 포기하고 야수의 성으로 향하는 똑똑한 벨이나 가족을 위해 전장으로 대리 출전하는 무신 뮬란, 사랑에 미쳐 (그놈의 다리 얻으려고!!!!) 목소리를 (아니 잠깐만 글은 왜 못쓰는 거냐고!!! 울화통) 포기한 아리엘. 마치 아름다운 재능 있는 여성이라면 뭐 한 가지는 포기해야지 밸런스가 맞지 흠흠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지랄 맞은 디즈니의 설정을 교묘하게 다 비켜가는 크루엘라의 서사는 우정, 재산, 쁘레따 포르테 데뷔(패알못이라 아무 말임), 대중의 관심, 커리어적 성취 무엇하나 포기하는 법 없이 대담하게 성장해나간다. 때로는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대체로 형편없는 사람들을 마주하기도 하면서. 마치 우리가 그러하듯이.


그녀는 원래 잘났고 그걸 가릴 수 있는 방법은 없지


하여 개는 건드리지 말 것, 사람을 죽이지 말 것 따위의 금기로 가득한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세상은 그녀가 거침없이 휘두르는 재능 앞에 일시적이나마 무력화된다. 그녀의 재능이 내뿜는 카리스마는 디즈니 특유의 러블리함을 누그러뜨리고 압도적인 천재성이란 비현실적인 요소가 오히려 이야기에 현실감이 더하는 기묘한 효과를 일으킨다. 그래 저런 재능이라면 스스로 빛날 수밖에 없지. 이런 게 개연성이다.


수없이 타인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배려하는 기존 디즈니 여주인공들과는 다르게 크루엘라는 그리고 그녀와 갈등 축을 이루는 남작부인은 자신이 가진 탁월성을 가리려 드는 법이 없다.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고 싸움판에서는 이겨야 제맛인 거고. 그녀들의 화법은 직설적이며 심지어 수행해야 할 프로젝트를 앞에 두고는 타인을 설득하거나(심지어 그녀들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에게 조차도) 이해를 받으려 들지도 않는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강한 드라이브를 걸 줄 아는 대담성 그리고 성취를 향한 강렬한 욕망만이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마치 관객마저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히어로는 세상을 구하지만 빌러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거침없이 내달리는 크루엘라의 주변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모인다. 재능 있는 인물이 (특히 여성이)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무수히 많은 부정적인 시련들, 이를테면 주변인들의 시기와 질투, 애정으로 포장되기 쉬운 족쇄들,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콤플렉스로 시간이 낭비되는 일 없이 각자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크루로 존재한다. 물론 그들 사이에 애정이 없진 않다. 그러나 그 애정은 크루엘라를 주저앉히기보다 그녀가 그녀 자체로 빛날 수 있도록, 더 깊이 들어가자면 크루엘라가 지닌 재능만이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굳건한 신뢰에서 비롯된 연대에 가까운 우정이다. 그것은 그녀가 성실하게 쌓아올린 자신만의 세계다.


고아로 만나 삶을 꾸려나가기까지 수없는 노동을 통해(소..소매치기) 빚어진 팀워크과 서로에 대한 믿음은 크루엘라가 다른 도전을 향할 수 있게 하는 근거지가 된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수없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은신처를 찾아내고 동료를 모으고 이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낸다.


특이한 머리색과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려운 외모, 어디서나 도드라지는 매운 성정을 가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생생한 원색의 보석은 마모되고 세공되어 다이아가 되기보다 형형한 고유의 색을 유지하길 원한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애정을 주는 대상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부드러운 마음과 거칠게 날뛰는 탁월함을 전시하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충분히 노력하고 고민하면서 크루엘라는 착한 하녀도 비열한 악마도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히어로 물이 빌런 서사를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조명하는 반면 크루엘라는 빌런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을 일대기로 보여준다. 히어로가 순식간에 박살내기 일수인 빌런의 세계는 사실 이런 방식으로 치밀하고 촘촘히 쌓아올린 것이었을테지.


대체로 압도적으로 파괴적이고 무계획적이며 큰 욕심이 없는 (캡틴아메리카의 꿈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늙어가는 것, 스파이더맨의 꿈은 이모와 무탈하게 사는 것, 심지어 슈퍼맨의 꿈도 평범하게 사는 것, 아이언맨은 관종이라 예외로, 비틀린 배트맨은 분석을 포기한다) 히어로들과는 달리 빌런들은 야망이 넘치고 섬세하며 계획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천재성과 천재성의 충돌, 보기 드문 악의 없는 두 여성의 서사


그래서 내게 <크루엘라> 서사의 주된 내용은 사실 복수극이라기보다 성장물이다. 비록 전체적인 줄거리는 복수극의 외피를 쓰고 전개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이것은 두 여성이 자신의 재능을 겨루고 성장을 쟁취하는 성장 영화 쪽에 더 가깝다. 빌런극의 빌런인 남작부인마저도 유능한 천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무려 디즈니 세계관에서 저지른 그녀의 악행에 비해 그녀의 품성은 무척 성숙한 편이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우리 상사들의 면모들을 떠올려보라.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신진 디자이너의 도전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크루엘라가 보여주는 다채로운 패션 스타일을 지켜보고 그것에 대항할 자신의 컬렉션을 준비한다. 인재라면 적극적인 발탁도 마다하지 않는다. 크루엘라의 재능을 알아보고 첫 기회를 건넨 것도 남작부인이다.


"난 나를 선택할 거야."


크루엘라가 번뜩이는 재능과 넘치는 관종끼로 파죽지세 남작부인의 아성을 뒤흔들자 남작부인은 에스텔라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크루엘라보다 오랜 시간 동안 패션계 원탑을 유지해온 짬바는 무시할 수 없는 경력이다. 수많은 위기와 시련을 겪으면서도 잃지 않은 재능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회로 만들어온 야성적 본능이 남작부인이 지닌 오만함의 원천이다. 그래서 추하지가 않다. 빌런의 품격이란 역시 실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건전한, 너무도 건전한 두 열혈 여성의 격돌


어디선가 많이 본 전개 아닌가. 그렇다. 이것은 소년물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재능 있는 주인공과 필적하게 재능 있는 빌런의 열혈 대결. 그리고 주인공은 빌런과의 수없는 전투를 통해 성장한다. 크루엘라와 남작부인의 대결은 빌런들치고는 무척 건전하다. 정직하게 옷을 만들고 (영화에서는 짧게 처리됐지만 아마도 현실로 치자면 대결의 순간보다 각자의 컬렉션을 성실하게 준비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재봉틀질에 소비됐겠지. 패디과 과제하는 것처럼. 디자인한 거 저장 안 해두면 아마 다 날려먹고 좌절하고 레드불 마시고 벤티 사이즈 스벅 아아 마시면서 뜬눈으로 지새울 수많은 그녀들의 밤들. 오열) 대중들에게 어떤 사기도 치지 않고 정말 근사한 옷들을 선보이고 그걸 또 서로 보고 앉았어.. 이거 얼마나 건전해(이마 짚기)

그녀들의 대결을 보다 보면 내가 오히려 빌런 같이 느껴져. 온갖 권모술수들을 목도하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내가..(하 회사 가기 싫다)


서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더 탁월해지기 위해 경주하는 그녀들의 레이스는 시원한 쾌감을 준다. 차라리 제발 편지를 쓰라고 천 번 외치고 싶은 인어공주나 그깟 장미값 때문에 팔려간 벨에게서는 못 만났던 매력이야.


더불어 다소 엉성한 스토리와 채 다 빠지지 않은 수많은 디즈니스러운 깜찍한 설정들을 상쇄해내는 두 엠마들의 연기력은 주로 두 남성을 주축으로 진행되는 캐릭터의 대립을 거의 완벽하게 두 여성의 이야기로 대체해냈다. (사실 이 문장의 역설은 '대결'과 '성장'이라는 보편적 주제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보편적인 테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여성 서사가 영화든 소설이든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 아직도 여전히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 있다) 그녀들의 욕망은 자연스럽고 행동은 거침없으며 무엇보다 매혹적인 카리스마가 입체적으로 생동한다.  


특히 크루엘라의 카리스마는 독보적인데 오만하면서도 다정하고 다정하면서도 냉혈하다. 선과 악, 한쪽 특성만이 존재하는 만화 속 인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는 다중적인 인격의 면모를 스스로 완벽히 컨트롤해내는 (강강약약) 크루엘라의 카리스마는 어색함이 없다.

 

매력적인 악역을 창조하기에는 극악스러운 핸디캡인 세 가지 금기를 깨지 않으면서도 빌런극 관람의 쾌감을 주는 오락영화를 잘 만들어냈다. 수없이 많은 디즈니 영화 속 일면적 빌런들은 진화에 진화를 거쳐 이제 주인공의 자리에 입성했다.


대범함, 진취적임, 카리스마, 재능

사실 이 모든 뛰어난 자질들이 그녀들이 빌런이 될 수밖에 없는 특성이라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말이다.  

 

p.s 솔직히 포스터에서 "안녕 자기?" 문구를 볼 때는 관람을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거의 긴스버그를 다룬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들>에 인싸 힙스터 패션 블라블라를 뿌려댔던 홍보 포스터와 비슷한 수준의 대참사) 처음 보았던 예고 영상 속 엠마 스톤의 형형한 안광과 비주얼 덕분에 무사관람.

  
크루엘라 한줄평 = 재규어 빌런 시리즈

https://youtu.be/Naqf42CBm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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