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라는 안도감

by soulblue

대중매체는 어딘지 사람을 안심시켜 주는 구석이 있다. 험난한 하루를 보내고 귀가한 뒤 의미 없이 켜두는 TV나 비가 쏟아지는 날 운전하며 고정해 둔 라디오는 이 모든 요란함이 실은 그저 또 다른 하루, 일상일 뿐이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테이프였다면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틀어주는 OCN의 고전 영화나 거리에서 목소리를 들으면 지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익숙한 MC들이 진행하는 오래된 라디오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주는 안도. 너무 놀라지 않아도 돼. 이 폭우도 지나갈 거야. 그저께 봤던 프로그램을 오늘 다시 해주고 있잖아. 틀림없이 내일도 네가 아는 일상일 거야.


귀에 익은 소리들을 들으며 저녁을 차리고 치우길 반복하다 보면 두근대던 마음이 차분해지고는 했다. 루틴함, 익숙한 반복을 통한 훈련.


내게는 안성기 배우 역시 그런 안도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TV를 틀면 그가 선전하는 광고가, 극장에 가면 그가 출연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으니까.


모든 게 숨 가쁘게 달려가고 변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압박스러운 세계 속에서 언제나 돌아보면 그 자리에 변함없는 존재감으로 일상을 함께 했다. 그 친근한 얼굴을 보다 보면 오늘도 내일도 괜찮을 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근거 없는 낙관이 피어나곤 했던 거다.


정통 배우로 천천히 쌓아가던 커리어의 일관성, 그러니까 굵은 마커로 그은 직선 같은 이력이 주는 안정감과 요란함과는 거리가 먼 정적인 행보가 주는 차분함이 폭풍우 속을 두려운 마음으로 운전해 나가던 어느 여름날 마주한 오래된 라디오 방송을 기억하게 한다.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광고까지 실로 대중매체의 상징 같던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퇴마록>의 박신부였던 배우.


비록 <퇴마록>은 흥행하지 못한 실패작으로 평가되지만 그의 수많은 이력의 절반 이상이 성공작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도 중요하게 느껴진다. 알고리듬과 효율적 계산, 극단적인 수익성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성공한 작품들과 그 보다 더 많이 실패한 작품들로 채워진 그의 이력을 되짚어 보다 한 시대가, 정성과 도전과 낭만과 성실함이 공존했던 한 사람의 인생과 함께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못내 아쉽고 애잔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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