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ulblue Jan 13. 2023

슬램덩크 좋아하세요?

더 퍼스트 슬램덩크 (The first slamdunk)


이상한 일이지만, 그래서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꽤 어려서부터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감각을 늘 해왔다. 일 외적으로는 심각한 무계획성의 인간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만큼은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는 이유도 쉽게 말하자면 내게 주어진 생이 단 한번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언제나 감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감각은 생각보다 자주 나를 찾아온다. 두렵거나 공포스러운 느낌이 아니라 그저 사실인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단 한번의 생.

슬램덩크는 사쿠라기 하나미치와 그 주변인들의 성장을 다루는 성장 만화다. 학원 폭력물이 인기 있을 당시에 발간되어 초창기에는 리젠트 머리, 패거리, 난투극 등등 학원물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정대만의 반삭과 함께 스포츠 장르로 굳건히 자리를 잡으며 이들이 좋은 팀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로 좁혀졌다.


농구 좋아하세요?

슬램덩크의 모든 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농구를 사랑한다. 직접 코트를 뛰지 않아도 중학교 때 농구를 하다가 포기한 채소연도 매니저인 한나도 북산의 오랜 터줏대감 채치수와 안경선배, 중학교 MVP로 촉망받는 인재였던 정대만, 유망주였던 형의 그림자에 가려있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농구를 좋아했던 송태섭, 타고난 재능에 승부욕까지 탑재한 올패키지 서태웅 모두 농구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다. 단 한 명 강백호만은 제외하고.


농구 좋아하세요?

채소연이 강백호의 피지컬을 보고 스카우팅 하며 묻는 이 말에 백호는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이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가 농구부에 가입하고 나서부터는 백호의 마음을 끄는 것은 단연코 농구다.


사실 나는 언제나 슬램덩크에서 가장 여린 사람을 강백호라고 생각해왔다. 항상 말쑥한 서태웅이나 가정이 화목해 보이는 채치수와는 달리 백호는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 그를 돌보는 것은 불량해 보이지만 근본은 선량한 그의 친구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백을 하고 차이기를 거듭하는 것도 의미 없는 싸움을 계속했던 것도 스스로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소년이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려했던 과정에 가깝다. 송태섭과 달리 강백호는 언제나 무리를 지어 다니며 그 안에서 외로움을 삭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가 무엇인가를 해낼 거라고 믿는 이도 없었다. 다만 좋은 친구들이 그의 여린 성정과 장점을 알아봐 주고 애정을 가지고 곁에 있어줬을 뿐. 하지만 애정은 기대와 달라서 소년은 애정만으로 성장할 수 없다. 아이의 성장은 언제나 어느 부분은 기대로부터 촉발된다.


그런  강백호에게 처음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채고 성장을 눈여겨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지금껏 쌓아 올린 농구 지식으로는 해독이 어려운 미지의 자질을 보유하고 있는 이 폭탄 같은 아이를 중요하게 써주는 안감독과 시종일관 티격대격하지만 자신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백호에게 자극받고 또 역으로 그를 자극하는 라이벌 서태웅, 못 믿을 놈에서 결국은 등을 맡길 있는 후계로 그를 인정하는 선배 채치수, 누구보다 빠르게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골을 돌려 기회를 만들어줬던 송태섭까지 이들을 만나고 나서야 강백호는 비로소 잃어버린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농구 그 자체만큼이나 강렬한 충족감일 거다.


이들과 함께하면서 백호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다. 풋내기 슛, 리바운드와 같은 농구 기술은 기본기에 불과하지만 정서적으로 그가 소속감 속에서 성장하는 속도는 마치 그동안의 지체된 시간들을 일순간에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다. 이미 다른 4인이 거의 완성된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기에 백호의 성장은 동시에 북산의 성장이기도 하다. 풋내기가 농구공을 한 손으로 드는데서 시작해서 슬램덩크를 하기까지 그리하여 한 팀이 함께 같은 목적을 향하기까지 이 모든 과정이 슬램덩크인 셈이고 그 안에서 백호는 단순히 공을 가지고 하는 게임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쌓아 올리면서 진심을 담아 다시 고백한다.


정말 진심으로 농구를 좋아한다고.


미완의 결말과 사쿠라기 하나미치

이 깨끗한 직선 같은 스포츠 만화가 명작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악명 높은 (사실은 많은 이들이 오히려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패퇴했다는 결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팀의 전국 제패라는 최종 목적은 좌절됐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강력한 우승팀을 이기는 데는 성공했다는 미묘한 밸런스의 결말에는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농구를 대하는 자세, 더 나아가 삶을 대하는 자세가 짙게 배어있다.


나는 이노우에가 농구만큼이나 애정을 보이는 것이 실은 실패에 대한, 또는 실패한 사람에 대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실패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자세에 대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캐릭터들의 눈부신 재능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한계를 애정한다. 이들은 엄청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심지어 최선을 다하지만 진짜 현실에서는 이에 대한 보상이 당연한 대가처럼 적절히 주어질 리가 없다.


피지컬과 재능을 모두 가졌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아 동료가 없었던 채치수, 개인 자질은 뛰어나지만 팀 플레이를 할 수 없었던 서태웅, 무릎부상으로 멘탈이 나간 정대만, 그리고 단신의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송태섭. 각자가 놓인 현실은 재능에 비례해 녹록지 않다. 만화 버프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는 그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특별한 악당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현실 그 자체가 주인공들의 꿈을 저지하는 강력한 벽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강백호는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에게는 좋아하는 농구를 지속하게 할 만한 든든한 배경이 없다. 언제나 양말도 없이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다니고 농구의 가장 기본적인 장비인 농구화 역시 준비하지 못한 채 능남과 연습 경기를 치른다. 그의 충격적인 첫 패배 이후 다 떨어진 운동화를 발견한 소연이가 같이 농구화를 골라주러 간다. 돈이 없던 그는 300엔으로 인심 좋은 숍 주인의 농구화를 강탈한다.


강백호의 일본 이름은 사쿠라기 하나미치다. 사쿠라기는 벚꽃을, 하나미치는 꽃이 아름답게 지는 거리를 연상시킨다. 한순간 만발해 눈부시지만 짧은 전성기를 누리다가 일순에 지는 벚꽃처럼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미래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암시가 느껴지는 작명이다. 중학교 때부터 훈련을 받아온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서태웅과 다르게 기본기도 없이 농구를 시작한 고등학생. 괴물 같은 체력과 동물적인 감으로 그 갭을 상쇄하지만 현실이라면 프로입단은 어렵지 않았을까. 더욱이 마지막 산왕전에서 유일한 무기였던 몸마저 부상을 입게 된 판국에 선수를 보호하지 않고 내보내는 팀이라니. 등의 부상이 치명적이지 않더라도 그는 상당 시간을 다시 재활로 흘려보내야 한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안다. 그 나이대에 시간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요소인지. 슬램덩크의 마지막 즈음 바닷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 강백호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재활이 어려웠을 거라고 예감한다. 아마도 그는 산왕전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장 기대받았고 외롭지 않았던, 벚꽃이 만개한 그의 전성기는 아마도 그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영감님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죠? 저는 지금입니다.’

는 명대사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읽어야한다. 프로리그였다면 당연히 벤치에 있어야 할 강백호가 부상을 불사하고 다시 경기에 뛰어든 것은 이노우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은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NBA에 진출하고 유명한 선수로 성공하는 것 외에도, 승패의 여부와는 별개로 우리 생에는 더 중요한 어떤 것들이 있다. 나만이 느낄지라도, 설령 먼 훗날 나만이 기억할지라도 인생에 가장 중요한 그 순간들은 실은 승패나 성공이 아닌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노우에에게 재능과 승패 혹은 성공은 순수하게 그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어떤 재능도 어떤 승리도 어떤 성공도 다른 요소들의 개입 없이 스스로 빛을 보지 못한다. 누군가는 타이밍이 주어지지 않아서 누군가는 적절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눈부신 재능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가?


그는 슬램덩크 전편을 통해 그렇게 물어온다. 이들의 분투를 당신들은 보았다. 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무의미한 과정이었는가? 강백호의 투혼은, 송태섭의 도전은, 채치수의 노력은, 서태웅의 성장은, 정대만의 용기는 과연 무의미했는가?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좋아하는 마음보다

이노우에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수없이 좌절을 한다. 꿈을 품에 안고도, 그 빛나고 반짝이는 것들을 끌어안고도 매번 패배를 반복한다.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수많은 변명들 뒤로 숨기도 하면서.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에게 가장 큰 시련은 역시 산왕전이었다. 북산의 5인은 신현철, 정우성, 이명헌, 김낙수 등 각 포지션 최강자들을 상대하며 각각 개인적인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타고난 재능에 미친 승부욕까지 더해져 자신의 성장 밖에 모르던 서태웅이 정우성에게 느끼는 압도적인 실력차, 무릎부상으로 꿈을 잃고 방황하던 자신을 (송태섭에게 처맞고) 극복하고 어렵게 복귀한 정대만이 집요한 마크에 체력이 바닥나며 느끼는 회한, 압박 수비의 표적이 되어서 장점인 빠른 드리블이 봉쇄된 송태섭의 패닉,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부상을 입고 바닥에 누워있는 강백호의 분함, 재능은 있지만 인복과 타이밍이 모자라 언제나 홀로 고군분투하던 채치수의 오랜 습관이었던 불안함.


이들에게는 모두 공통적으로 헛되게 보낸 시간들을 후회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팀을 돌아보지 못했던 미숙한 시간들, 기초 체력을 낭비하게 만들어버린 일탈의 시간들, 슬픔으로 완전히 좋아하는 것에 매진하지 못했던 방황의 시간들, 믿을만한 동료가 없었기에 언제나 전국제패를 꿈꾸면서도 실은 그 가능성을 스스로조차 믿지 못한 채 빼앗겨버린 시간들, 그리고 더 빨리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흘려보내버렸던 시간들까지.


이들에게 산왕전은 단순한 시합이 아니라 생을 통해 자신이 쌓아 올린 한계와 후회의 총합, 다시말해 최종적으로 스스로 뛰어넘고 싶은 벽 그 자체인 셈이다. 이 순간,


후회하지 말 것. 후회하지 않는 것.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스스로가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이노우에는 말한다. 그에게는 추후에 누가 미국에 진출하거나 유명한 선수가 되었다는 후일담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만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 자신의 전부를 오롯이 걸고 덤비는 오늘 이 순간만이 중요하다. 의미 있다. 유효하다. 당신의 영광의 순간이 언제였든 지금 이 순간보다 중요할 순 없다. 그렇게 하나미치는 자신의 재능을 만개한다. 동료들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단 한번. 지금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의 확률을 뚫고서. 그 가치를 우리가 안다. 그리하여 이 생의 의미를 당신이 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번에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슬램덩크의 주제의식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산왕전을 팀의 브레인 송태섭을 중심으로 두고 진행시켜 간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슬램덩크 종료 후 유일하게 그려낸 단편작 <pierce>를 배경으로 두고 송태섭이 팀을 이끌고 고교 최강 산왕을 상대로 승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송태섭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긴 하지만 전술한 북산 5인의 후회의 순간과 절정의 순간이 함께 찾아온다. 산왕이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며 서태웅은 패스를 정대만은 불굴의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송태섭은 뚫고 나가는 용기를, 채치수는 진정한 동료를, 강백호는 영광의 순간을 손에 넣는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우리 생의 의미를 당신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우리들이 텅 빈 생을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 넣는 광경을, 다시 말해 벚꽃처럼 만개하는 광경을 보고 싶다. 언제나 터덕이고 매 순간 어긋나는 타이밍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생의 중요한 지점에서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가기를, 뚫어나가기를, 정말 중요한 것은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순간이 전부 유효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그리하여 후회하지 않기를.


당신에게도 이 생은 단 한 번뿐이므로.


ps. 슬램덩크를 매번 볼 때마다 언제나 강백호의 미래가 마음에 걸렸었다. 송태섭을 중심으로 산왕전을 배치해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경기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강백호. 과연 그는 재활에 성공했을까? 다시 농구를 할 수 있었을까? 망할 영감탱이 부상자는 빨리 빼야지 무슨 미친 짓입니까 매번 오열하고는 했는데 이번에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차기작이었던 <리얼>에서 강백호가 대학농구 리그에 입성했으며 농구선수로 활동했다는 증거가 되는 트라이아웃 전단지가 등장했다는 제보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강백호는 적어도 재활에 성공했으며 좋아하는 농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 정말로. 정말 다행이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