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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Jan 20. 2023

슬램덩크에서 가장 농구를 사랑하는 남자

실패로부터 쏘아 올린 버저비터. 정대만


사랑하는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는다.

다시 도전하거나 포기하거나.



정대만은 여리다. 여린데 감성적이다. 개인적으로 채치수 역시 만만치 않은 유리멘탈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리다와 감성적이다는 정말 파괴적인 조합이다. 채치수가 특유의 우직한 둔감함으로 악조건 속에서도 어느 정도 멘탈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정대만은 섬세한 감수성 때문에 무너졌다.


좀처럼 따라와 주지 않는 동료들, 농구 명문과는 거리가 먼 북산고의 상황, 지도자의 상습적인 부재 등의 악재를 끊임없이 인내하며 전국제패를 습관처럼 되뇌던 채치수와는 달리 정대만은 도저히 자신의 실패를 모른 척 외면할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입은 치명적인 무릎부상, 그것도 오랜 재활기간이 필요한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농구선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섬세한 감성은 때로는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기대를 받고 자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강백호와 다르게 정대만은 언제나 큰 기대 속에서 성장해 왔다. 중학 리그 MVP. 혼자만의 기량만으로도 한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있는 재능과 리더십. 거기에 연습코트에서 타인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는 호쾌함과 열등감이 무엇인지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성정까지. 암울했던 유사 양아치 시절을 제외하면 정신적으로 미숙한 서태웅이나 다혈질의 송태섭과는 다르게 정대만은 안정적이다. 그의 높은 자존감은 실로 한 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뤄낸 역사의 전리품인 셈이다. 경기에 승패는 있어도 정대만의 정신은 실질적으로 패배해 본 전적이 없다. 그러나 눈부신 재능의 허점은 실은 이 무패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포기하는 순간 시합은 끝나는 거예요.

(많은 학생들을 홀린) 안감독의 필살기를 듣고 감명받은 정대만은 수많은 러브콜을 뒤로하고 북산에 입학한다. 중학 리그 유망주가 농구 약체인 북산에 입학하기까지는 그의 무패 기록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혼자서 이끌어냈던  승리의 경험들. 항상 그렇듯이 이번에도, 그러니까 (약체) 북산에서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다. 좋은 센터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엉성한 채치수와 평범한 수준의 권준호를 부원으로 만나면서도 그는 한 번도 북산의 패배를, 실은 자신의 패배를 예상해 본 적이 없다. 늘 그렇듯이 결국 원하는 것을 이뤄낼 것이다. 노력만 한다면. 집이 가까워서 북산을 선택했다는 서태웅과도 유사한 사고방식이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결국은 해낼 수 있다. 내가 있다면. 실로 스스로에 대한 깊은 확신과 또 그 확신을 허언이 아님을 결과로 증명해 왔던 인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굉장한 긍정의 태도다.


그러나 나는 정대만이 이 시점에서 안감독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표면상 드러나는 말의 뜻은 이해하지만 그것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한 번의 경기로, 한 번의 패배나 승리로 이해할 수 없는 폭을 지닌 문장이다. 포기한다는 것의 의미를 정대만은 알지 못한다. 그는 한 번도 정신적으로 패배해 본 적이 없다. 그는 해남전에서 패스 미스로 경기에 패하고 우는 강백호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한다(반면 채치수는 그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패배를 모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승리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픔을 모른다는 것이 결함이 될 리가 없다. 어떤 것들은 영원히 모르고 지나가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괴로운 일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가능하면 고통 없이, 괴로움 없이,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면 도망치면서 사는 게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내 안의 가장 좋은 것들이 시련 앞에 속절없이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을 지켜볼 때면, 스스로가 그렇게 무너지는 것을 인지할 때면 어쩔 수 없이 간절히 바란다. 어떤 경험들은 우리를 피해 가기를. 운이 좋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기도 한다. 치명적인 상실이나 고통을 겪지 않고 평탄하게. 그러나 그건 몹시 드문 일이다.


그렇다. 정대만에게만 세상이 그렇게 상냥할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이제 막 커리어가 시작되는 시점에 그는 부상을 당한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경험에 노출됐을 때 과거에 스스로가 쌓아 올린 자산을 사용해 대미지를 막아보고자 한다. 정대만 특유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실력으로부터 기인하는 낙천적 성향이 부상에 대응한다. 그에게는 꾸준히 재활치료를 받으면 곧 다시 코트 위에 설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치료가 예상보다 더디고 이로 인한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지금껏 쌓아 올린 자존감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재능에 비해 둔하다는 약점을 끈기로 뚫어내는 채치수와 특유의 성실함으로 서서히 실력을 쌓아가는 권준호의 성장을 지켜볼수록 정대만은 초조해진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다. 벌어지는 격차(실은 좁혀지는 격차).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무척 생경하고 낯선 감각이었을 것이다. 한 번도 자신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단 한 번의 의심으로도 무너지는 법이다.  


농구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을 만큼. 공부도 곧잘 하는 채치수나 권준호와는 달리 정대만에게는 농구밖에 없다. 눈부신 재능 덕분에 한 번도 농구가 없는 삶을 상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다시 따라잡아야 해. 초조한 마음에 섣부르게 복귀한 코트에서 부상은 더 악화되고 회복은 더 멀어진다. 아마도 프로 선수를 지망했을 정대만에게 이 지연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선명했을 것이다.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친다. 뒤쳐진다. 한 번도 서 본 적 없는 자리로 밀려난다. 누군가의 뒤에 선다. 어쩌면 다시는 앞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너무 절실히 원하면 오히려 그것을 가장 먼저 포기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쌓아 올린 승리의 경험들이 오히려 회복을 지연시킨다. 적절한 패배는 백신과 같아서, 작은 상처들을 스스로 치료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회복의 프로세스를 믿는다. 전에도 해 본 적이 있으니 자신과 시간의 힘을 신뢰한다. 정대만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스스로의 재능으로 모두를 구해낸 적은 있어도 정작 자기 자신을 구해내 본 경험이 없다.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 본 적도 실제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뎌낸 적도 없다. 생에 처음 맞는 패배. 과거의 자신이 눈부셨던 만큼 지금의 그림자도 거대하다. 이 시간들을 혼자서 이겨낼 수 있는 자산이 지금의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채치수만큼 둔하다면 오히려 기합으로 이겨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그는 가공할 우직함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극복해 낸다). 권준호처럼 처음부터 기대할 재능이 특출 나지 않았더라면 더 희망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강백호처럼 풋내기였다면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앞으로는 나아질 일만 남은 셈이니. 이들은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큼 나아질 수 있다. 지금이 가장 미숙할 때니까. 그러나 정대만은 정확히 이들의 반대 지점에 서 있다.


슬램덩크의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미숙함에서 월등함으로 성장한다. 강백호도 채치수도 권준호도 심지어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인 서태웅이나 정우성도. 성장 속도나 폭의 차이는 있지만 방향성만은 자신의 과거에서 한 번도 구겨짐 없이 더 나아지는 쪽으로 향한다. 오직 정대만만이 가장 높았던 곳으로부터 바닥으로 추락한다. 경기 중 강백호가 서태웅을, 서태웅이 정우성이나 윤대협을, 채치수가 변덕규나 신현철을, 송태섭이 이정환이나 이명헌을 의식하며 상대할 때 정대만 혼자서만 자신의 과거를 상대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가장 빛났던 순간을 고통스러울 만큼 반복해서 재생한다. 마치 그것만이 자신이 극복해야 할 유일한 벽이라는 듯이.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은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이다.

한 번도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다. 진심이야말로 가장 상처받기 쉬운 마음이다. 무엇인가를 소중히 여길수록 바로 그것이 가장 강력한 약점이 된다는 역설. 정대만은 농구를 너무 사랑해서 농구를 멈춘다. 넘치는 재능에 비례해서 쏟아졌던 찬사나 기대가 부담스러워서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견디기가 어려웠을 거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가, 하루가 다르게 퇴보해 가는 능력이. 가장 사랑했던 것들이 가장 빠르게 사라지는 광경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대만은 한 번도 농구를 포기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세계관 붕괴냐 싶겠지만 부상으로 2년 동안 방황하며 코트를 떠나 있을 때도 정대만은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다. 영걸 무리와 의미 없이 거리에서 중요한 시간을 버려가면서도 정작 운동선수의 폐활량에 치명적인 담배를 손 대본 적 없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복귀를 누구보다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자신이 결코 코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거다.


착실히 쌓아 올린 사람의 성정은 좀처럼 잘 안 변한다. 복귀 이후 정대만은 과거 자신이 만들어놓은 자산만으로 뛰고 있다며 자조 섞인 후회를 하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은 과거의 자신이 쌓아 올린 게 단순히 기술이나 체력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운동선수로서 충실히 보낸 시간들은 비록 그가 코트 위에 서지는 않았지만 그를 최악의 결정들로부터 보호하는 강력한 정신으로 기능했다. 비행이라는 건 사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빠져들면 모든 게 쉬워진다. 술도 담배도 약도 폭력도.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서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면서도 지난 시간 동안 습관처럼 만들어 놓은 루틴이, 몸의 기억이, 정신의 한도가 완벽한 탈선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게 기능했다. 그가 포기하려 했던 농구가 그를 지켜온 셈이다.


농구를 하는 녀석들만 보면 이유 없이 시비를 걸었던 것도, 흔들림 없이 농구를 포기하지 않는 송태섭에게 가장 크게 발작버튼이 눌렸던 것도 사실 그 스스로의 마음이 한 번도 농구를 떠난 적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강렬히, 끊임없이 농구를 의식하고 고민해 왔던 거다. 외곽에서.


사랑하는 것들이 무너진 자리에는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는다.

다시 도전하거나 포기하거나.


송태섭은 전자를 선택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괴로움, 이유 없이 가해지는 이지메, 그리고 유독 자신에게만 시비를 거는 정대만 패거리까지. 세상 모든 것들이 자신이 농구를 지속하는 걸 반대라도 하는 것처럼 작동할 때에도 송태섭은 코트 위로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꺾이지 않는 그 의지와 마주할 때마다 정대만은 더 크게 무너진다. 어째서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어째서 나는 그렇게 쉽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제일 먼저 버렸던 걸까.


송태섭의 존재는 그 자체로 명징한 증거다. 세상이 당신에게 가혹하더라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타인의 도움조차 없이 (송태섭은 채치수나 안감독에게 조차 특별한 도움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그의 가족마저도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송태섭을 제대로 바라보는데 실패해 왔다) 혼자만의 힘으로 끊임없이 다시 코트 위를 향하고 또 향하는 그를 지켜보면서 정대만은 지금껏 과거 자신이 가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단 한순간도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슛을 넣을 때마다 쏟아지는 환호성, 실력은 모자라지만 무리 없이 자신을 따라주는 좋은 동료들, 적절한 시점에 마법처럼 나타나 포기하지 말라는 조언을 건네었던 명감독까지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었던 자신의 농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대만은 초조해진다. 어쩌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농구는 그저 외피에 불과했던 것은 아닌지, 정작 자신은 그 본질에 단 한순간도 다다르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농구를 좋아했던 걸까?


정대만은 처음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굴욕과 패배감을 단신의 오키나와 꼬마로부터. 송태섭이 농구를 잘하든 못하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자신이 하지 못했던, 너무 쉽게 놓았던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내려놓았던 것들을 그러모아서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해 나가는 송태섭을 바라보는 건 지속적으로 애써 외면하고 덮어두려고 했던 자신의 한심함을 끊임없이 들춰내는 고통이었다.


농구가 하고 싶어요.


이 단순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회로를 거쳤어야 하는 가. 싸움을 걸기만 하면 처발리는 최약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덤비는 정대만의 비정상적인 집요함 이면에는 농구를 다시 하고 싶다는 열망이 숨겨져 있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을 통해 생에 처음으로 실패라는 경험을 직시하게 된다. 극명히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명암. 송태섭을 건드리는 것은 정대만이지만 자극받은 것 역시 자신이라는 희한한 뫼비우스 띠. 송태섭의 흔들리지 않음이 정대만에게는 오히려 큰 위안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나도 다시 농구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정대만은 계속해서 닫힌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집요하리만큼 농구부를 두들겨댄다. 비록 두들겨지는 것은 본인 자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송태섭에게 패배하며 오랜 시간 외면해 온 깊은 열망을 인정하게 된다. 물론 그의 오랜 동기였던 채치수의 정신 번쩍 나는 싸대기와 권준호의 환상적인 과거 들이밀기 스킬이 교묘하게 혼합되어서(거의 무적의 마법포션임).

 

포기를 모르는 남자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쉽게 포기하던 과거와 달라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최악의 상황에서도 농구를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내면의 강함을 비로소 인지하고 인정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꾸준히 쌓아 올렸으면 스스로도 획득할 수 있었을 팀의 에이스, 도내 no.1의 자리. 화려하게 빛나는 강한 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정대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코트 위에 서는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라는 것을, 방황하지 않았더라면 얻었을지도 모를 미래의 재능과 위치를 아쉬워하기보다 현재 극명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남아있는 재능을 충분히 활용해 주어진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것은 시간을 낭비해 본 경험이 있는 정대만만이 알 수 있는 감각이다. 강백호가 타인의 기대 속에 성장하며 이해하게 된 영광의 순간을 정대만은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모든 기대에서 벗어난, 현실에 대한 완전한 긍정을 통해 체화한다.


진정으로 강해진다는 것은 무결한 무패의 전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패배를 겪으면서도 또다시 공을 던질 수 있는 정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실력이란 언제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를 미지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에게 주어져있는 것들을 소중히 활용해 새로운 가능성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순간에 있음을.


아카기는 아카기. 나는?

정대만의 농구는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본질을 알아가는 과정과도 연결돼있다. 그는 그렇게 팀의 위기마다 외곽에서 팀을 구해내는 존재가 된다. 한 번도 주춤하지 않고 성장해 가는 괴물 같은 동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정점에서 추락해 본 존재로서, 인사이드로 파고들지 않고서도 자신만의 강점을 살려 2년의 공백을 성실히 채워 넣는다.


그래서 그가 현재 자신에게 남아있는 강력한 무기인 3점 슛을 던지며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 관객들의 요란한 환호성이 아니라 깨끗한 호를 그리는 골의 궤적에 따라붙는 완벽한 침묵임이 중요하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향한 기대나 타이틀이 아니라 바로 단순히 바스켓에 골을 넣는 농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결국 정대만은 자신의 실패를 관통하며 스스로를 재구성해내는 데 성공한다. 뒤쳐지고 있는 초조한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 터지는 버저비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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