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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blue Jan 18. 2023

슬램덩크에서 가장 늦게 성장한 남자

농구광에서 농구 선수로. 서태웅

슬램덩크에서 성장이 가장 빠른 캐릭터를 말하자면 단연 강백호일 거다. 농구를 시작한 지 4달 만에 북산의 스타팅 멤버로 뛰는 강백호의 성장은 가파르고 비약적이다. 그렇다면 성장이 가장 느린 캐릭터는 누구일까? 나는 의외로 서태웅이라고 생각한다.



중학 시절부터 주목받던 완성형에 가까운 천재. 그는 정대만처럼 모두의 기대 속에 고교 리그로 올라왔으나 정대만과는 다르게 기복이 거의 없다. 외형상 그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는 풍전의 에이스 킬러 남훈에게 부상을 입고 시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가 전부다. 포지션이 특별히  정해지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올라운더. 다혈질의 송태섭이나 예상보다 유리멘탈인 정대만, 심지어 주장 채치수조차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강철 같은 멘탈로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데다가 강한 상대를 만날 때마다 업그레이드 속도도 엄청나다. 농구만 생각하는 농구 도아후. 농구미치광이. 그런데 그의 성장이 가장 느리다고?


New power generation

북산의 거의 모든 멤버들이 자신들의 과거에서 기인한 한계에 부딪힐 때, 서태웅만이 유일하게 내적인 갈등이 거의 없다. 과거의 일탈로 인해 고질적인 체력의 문제를 겪는 정대만, 약체 북산이라는 팀 자체를 어깨에 얹은 채 매 시합을 치르다 보니 결국은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전국제패를 확신할 수 없게 된 채치수, 의미 없는 싸움으로 시간을 버리고 다녔던 강백호와 형의 그림자와 함께 뛰던 송태섭까지. 서태웅만이 유일하게 오점으로 남을 과거도 발목을 잡는 사연도 없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한 캔버스. 눈부신 재능이 있다면 명암도 존재해야 할 텐데 심지어 서태웅은 (많이들 오해하듯이) 나태하거나 오만하지도 않다. 그와 가장 닮은 캐릭터는 정우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백호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지 못하거나  좋게 찾아냈다 하더라도 정대만처럼 놓쳐버리기도 한다. 겨우   가지 함정을 피해 가면 이번에는 채치수처럼 주변의 상황 때문에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우성과 서태웅은  모든 것들로부터 비껴 나있다. 어린 나이부터 또래에 비해 독보적인 재능을 보유했고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 앞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축복이다.


강백호가 2만 번의 슛 연습을 할 때, 이미 서태웅의 슛 연습 누적치는 100만 번이었다. 시간의 결이 겹겹이 쌓여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압도적인 차이를 인지한 강백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여기에 스스로의 실력을 정확히 인지하고 더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집요한 승부근성이 더해져 실로 서태웅은 정진하는 천재라는 기묘한 조합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만화적으로는 흔치 않은 존재지만 (그래서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지만) 사실 현실에서 대부분의 톱클래스 운동선수들은 이 전형에 가깝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을 알고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보다 삶도 사고도 단순하다. 어떤 위협이 와도, 어떤 방해물을 만나도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태도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 됐든 모든 과정을 통해 분명히 성장할 자신을 알기 때문에. 이것이 서태웅의 가장 큰 재능이다.


중학 리그를 경험하고 고교 리그에 데뷔하고 이윽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 매우 단선적이다. 강백호처럼 드라마틱한 비약이 아니라 단계적인 상승이자 차곡차곡 쌓여가는 스펙이다. 덜어내야 할 군더더기도 없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향해 직선으로 내리꽂는다. 직선에는 낭비하는 시간도, 버리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


그는 강백호와는 정확히 반대 위치에서 모두의 기대 속에서 북산에 입학한다. 재능과 승부욕, 그리고 성실함이라는 올 패키지로. 채치수만의 꿈으로 사라질 뻔한 전국제패도, 안경선배의 늦어진 은퇴도, 아마도 안감독의 정신적인 복귀까지도 어쩌면 이때부터 이미 서태웅의 어깨에 걸려있었는지도 모른다.


경험이 성장시키는 소년들, 정우성과 서태웅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정우성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코믹스 버전에서부터 잘 드러나지 않던 서태웅의 이면은 아마 저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정우성도 서태웅도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것도 지나치게 완벽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정우성에게는 손정웅 같은 아버지가 존재했고 서태웅은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중학시절부터 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잘 재단된 탄탄한 코스를 밟아온 듯 보인다. 환경만이 아니라 운에 기대야 하는 다른 외적인 요인들, 그러니까 채치수 같이 발목을 잡던 동료들이나, 정대만 같은 치명적인 부상도 없는 완벽한 커리어.


그래서 정우성은 무료했다고 한다. 눈부신 재능에는 죄가 없다. 이 쪽은 자신보다 모자라는 상대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오만함이 아니라 다만 정말 즐겁지 않은 쪽에 가깝다. 이들에게는 이 압도적인 실력차라는 게 오히려 핸디캡이 되는 셈이다. 자신의 재능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장 즐겁지 않게 만드는 아이러니. 그래서 자극제를 찾는다. 이들에게는 승패보다도 무엇보다 자극이 필요하다. 승부욕의 화신들이 의외로 패배에 더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건 이런 이유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아직 더 성장할 수 있음을 절실히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정우성은 산왕전에서 서태웅을 발견하고 즐거워한다. 서태웅은 현시점에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실력차를 보여준 정우성 앞에서 모처럼 미소를 짓는다. 모두가 번갈아가며 산왕의 전력에 패닉 할 때 누구보다 생동했던 것은 서태웅이다(아 그리고 강백호도, 좀 다른 의미로).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무엇이 부족한 걸까? 부족한 게 있기는 한 걸까?


'저에게 필요한 경험을 주세요.'


이들의 유일한 빈칸은 바로 경험이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도 어른의 경험치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 뼛속까지 재능으로 이뤄진 천재라 할지라도 간절한 승부욕과 하루도 빠짐없이 코트 위를 뛰었던 성실함조차 물리적인 경험을 급속충전할 수는 없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경험을 쌓는 유일한 방법은 시간의 축적, 단 한 가지다.

그리고 경험은 무엇보다 이들이 목말라있는 성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완벽한 패키지에도 미숙함이 있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나이. 좋아하는 농구는 마음껏 해왔지만 인생은 아직 멀었다. 농구를 제외하면 서태웅 역시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직선으로 달려가는 삶의 패턴 때문에 더더욱. 스포츠 장르 만화의 외형 때문에 간과되기 쉽지만 이노우에는 반복적으로 이점을 강조한다. 농구는 한 사람의 스포츠가 아니다. 팀의 스포츠다. 바꿔 말하자면 농구는 성숙한 인간만이 잘할 수 있다. 이노우에에게는 그래서 성장이 중요하다. 그것도 기술로서의 성장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성장이.


강백호를 풋내기라고 한다. 더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초짜라고 바뀌어서 올드 팬들의 공분을 샀지만 어쨌든 풋내기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나는 서태웅을 떠올린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린 사람들이 사실은 누구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로할 줄 아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시 송태섭이 가장 용감하다고 생각하고 강백호나 정대만이 여리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후자가 나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은 여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해진다. 적절한 자극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들은 그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


타인의 기대를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강백호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신경 쓴다. 요란하고 시끄러워서 누구보다 정신없어 보이지만 실은 자신에게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생각보다 자주 멘탈이 털리는 주장 채치수가 불안해하거나 팀원들이 위축돼 경기의 흐름이 나쁘게 흘러갈 때 가장 먼저 이를 눈치채고 기민하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다름 아닌 강백호다. 사람과의 관계가 절실했던, 더 나아가 세상과 가장 연결되고 싶었던 강렬한 백호의 열망은 그런 식으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민감한 센서를 지니게 한 셈이다. 형들에게 반말하고 막무가내 멍청이로 보이지만 요란한 외면을 걷어내고 나면 실은 가장 성숙한 면을 지니고 있는 백호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그는 사려 깊고 타인을 이해한다. 은퇴를 이야기하는 권준호의 말을 가장 깊이 기억하고 있던 것도 강백호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코트를 뛸 줄도 안다. 몇 번이나 받아내던 루즈볼, 부상을 불사한 경기 복귀. 자신이 골을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팀원에게 골을 넘겨주기 위한 리바운드가 그의 주특기인 것은 단순히 그가 탄력 있고 높은 점프를 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인격면에서 강백호는 서태웅을 압도한다.


반면 서태웅은 농구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본성이 오만한 게 아니라 잘 모르는 거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농구의 기술적인 영역 외에는. 좋아하는 농구를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어쩌면 농구 안에 있는 요소가 아니라 밖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건 알면서 고의로 무시하는 게 아니라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에 가깝다. 건방진 녀석이라는 평은 그래서 쉽게 붙지만 사실은 아직 잘 모르는 것뿐이다. 서태웅도 정우성도 모두 좋은 녀석들이다. 이들은 타인의 재능을 자주 일찍 알아차리고 이를 짓밟기보다는 성장시키길 원한다. 천성이 선한 거다. 강백호의 실점에 관대하고 ('내 계산 안에 있다.'라는 나름 위로의 말을 했다) 그의 부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거나 팀 동료들을 다독일 줄도 안다. 이런 사람이 오만할리 없지 않은가. 다만 아직 잘 모르는 거다. 농구 외적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됐다고.


그래서 기술적인 연습에 매진한다. 정우성이나 서태웅 모두 1on1에 적극적인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잘 모르니까 잘하는 걸 열심히 하는 거다. 본인이 확신할 수 있는 영역에 매진하는 거다. 그 점을 (전지전능하신) 윤대협은 안다. 이들의 허점을. 이들의 빈칸을.  


북산이 산왕을 만나기까지 화려한 몇 개월은 그렇게 서태웅의 성장과 함께 한다. 강백호의 성장이 고속열차라면 서태웅의 성장은 자전거와 같다. 느리고 더디다. 그래서 서태웅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강백호를 누구보다 의식하고 있다. 다만 그를 신경 쓰게 하는 것이 농구적 스킬이라기보다 강백호 자체가 지니고 있던 인격적인 성숙함이라는 건 아마 인지하지 못한 채로.


강백호의 엄청난 피지컬이나 이 피지컬을 기반으로 하는 파괴력 있는 플레이 스타일에도 반응하지만 실제로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가장 크게 자극받는 지점은 언제나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아직 몸에 잘 익지 않은 농구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식할 만큼 매진하는 자세, 팀의 기세가 꺾일 때마다 기민하게 분위기를 바꾸는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농구 기술이 아니라 팀의 멘탈을 관리하는 방식의 지능적인 리더십까지(그렇다. 나는 강백호가 매우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팀이란 뭘까? 그리고 주장의 역할이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채치수가 파이팅 구호를 송태섭에게 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질적으로 산왕전 코트를 리딩했던 존재가 송태섭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씬이다. 채치수의 리더십이 이제 송태섭에게 이양되었음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좋은 리더는 스킬이 월등한 실력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전술을 짜내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경기의 순간까지 함께 쌓아 올린 경험의 의미들을 누구보다 잘 핸들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속한 팀의 동료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진짜 의미다.


슬램덩크에서 농구의 기술적인 측면은 희한한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 기본 볼 핸들링부터 시작한 강백호는 최후 산왕전에서 기본 슛으로 챕터를 종결시킨다.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가장 심플한 기본기가 시작과 끝을 통해 강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램덩크에서의 성장은 단순한 스킬의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노우에가 24편의 호흡이 긴 만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천둥벌거숭이 같던 강백호와 다혈질의 송태섭, (생각보다) 소심한 채치수, 유리멘탈 정대만 그리고 미숙한 서태웅 모두의 인간으로서의 성장이었던 거다.


Diamond & Pearls


어떤 면에서 서태웅은 가장 고등학생다운 캐릭터다. 송태섭의 강인한 멘탈과 방황을 통해 길러진 정대만의 성숙함과는 다르게 서태웅이야말로 경험의 폭이 좁다. 농구를 제외하고는. 잘 표현할 줄 모르고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어 하고 팀원들에게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깊은 편도 아니다. 그의 단 하나의 목적은 좋아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하고 싶은 것 단 하나다. 하지만 그 스포츠가 농구라는 것. 이게 서태웅의 딜레마다. 농구는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함께 수많은 경기에 임하면서 다른 북산 멤버들처럼 서태웅 역시 성장한다. 강백호와 같은 비약적인 성장은 아니지만 서서히. 농구부에서 친구 사귀는 법 따위를 가르칠리 없으니 몹시 더디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서 스스로 터득해야 했지만 서태웅은 꾸준히 배워나간다. 정대만의 흑역사 농구부 습격사건이랄지 채치수의 부상, 풍전의 격투 농구 등의 사건들을 함께 하면서 서태웅은 농구를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체득한다. 함께 겪는 공통의 경험들이,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동료들이, 그들이 각자 쌓아 올린 개개인의 역사가 더불어 농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1on1에서 벗어나 다른 4인과 함께 뛰는 진짜  경기의 의미를.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강백호가 있다.


나는 서태웅이야말로 강백호에게 많은 것을 배웠을 거라고 믿는다. 서태웅의 승부욕과는 조금 다른 강백호의 강렬한 집념이야말로 서태웅을 가장 놀라게 한 부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강백호의 집념은 서태웅의 승부욕과는 다르게 팀을 위한 형태를 띤다. 마지막까지 빠져나가는 루즈볼을 향하는, 그래서 몇 번이고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모습을 보며 서태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산왕과 1점 차를 남겨 두고 정우성이 마지막 슛을 성공시켰을 때, 모두가 이제 경기가 끝났다고 믿었던 그 순간 반대 코트로 달리기 시작한 강백호의 등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든 씬이 무음으로 진행된 그 라스트 시퀀스에서 먼저 뛰쳐나가는 강백호의 등을 바라보며 채치수에게 패스를 요청하는 서태웅의 모습은 절실하기 그지없다. 연결시켜야 한다. 마지막 기회를. 우리의.


전설의 그 패스 장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서태웅이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자 강백호를 발견하고는 패스한 거다. 아니다 이미 처음부터 강백호를 봤으니 디펜스에 안 걸려있던 강백호에게 의도적으로 패스한 거다 하는.


강백호는 이미 부상으로 전력상 손실이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안경선배가 투입되는 게 현실적이다. 서태웅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백호가 코트로 복귀하고 싶어 할 때, 복귀를 앞두고 잠시 주저할 때 서태웅은 강백호의 감정을 읽어낸다. 거기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들어올 거면 들어와.


타인의 감정을 읽어내고 때로는 승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농구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서태웅도 이해하기 시작한 거다. 농구는 산수가 아니니까.


이때부터 이미 서태웅은 강백호의 부상이 그토록 원하는 승리에서 멀어지는 감점 요소가 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끝까지 함께 어울려 줄 각오가 됐던 것이 아닐까 한다. 한 사람의 선수로서 이미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초월한 강백호를 인정하면서.


마지막 오펜스 라운드에서 나는 처음부터 서태웅의 머릿속에는 강백호라는 변수가 계산되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것은 너의 실수 따위는 이미 내 머릿속에 있지 종류의 위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한 명의 선수로서 강백호를 전술적 계산 안에 넣었다는 쪽의 의미다. 1안은 자신이 슛을 성공시킬 것, 2안은 슛을 넣을 수 있는 가장 확률이 높은 다른 선수에게 패스할 것. 더블블로킹에 가로막힌 서태웅은 2안을 선택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 찰나가 언제나 1인분의 역할을 못했기에 채워줘야 했던, 혹은 실수를 감안해야 했던 핸디캡 강백호가 완벽하게 서태웅이 존중할 수 있는 동료 선수로 자리 잡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는 점에서, 매번 이 장면을 보게 될 때마다 나는 내적 오열을 한다. 은근히 신경 쓰이던 무엇인가로 끊임없이 자신을 성장시켰고 팀을 이끌어갔던 강백호로부터 그는 진짜 농구를 배운다. 1on1의 한 사람에서 3인과 플레이하는 서태웅으로, 그리고 마침내 4인과 함께 뛸 수 있는 팀플레이어로서의 성장이다. 농구광은 그렇게 농구 선수가 된다.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서태웅의 일본 이름은 루카와 카에데.

흐르는 물에 핀 단풍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이른 봄의 벚꽃이라면 사계 중 비교적 후반에 천천히 흐드러지는 단풍처럼 서태웅의 생에도 드디어 다양한 색이 입혀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시간에 주어진 경험들을 통해 농구만이 아니라 그 외적으로도 인간으로서 그는 배우고 정진하고 또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페이스로. 천천히.


그리고 나는 서태웅의 이 느린 성장을 무척 좋아한다.


ps. 마지막 패스를 받았을 당시 강백호가 서 있던 곳이 그가 2만 번 연습했던 슛 장소 중에 가장 성공할 확률이 높았던 45도 각도였을 거라는 점이 또 다른 오열 포인트. 누군가 자신의 뒤를 따라 골을 운반해 왔을 때, 그리고 그 슛 시도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준비하고 서 있었던 거다.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슛감각을 기억해내면서. 슛 하나 넣고 도취돼서 디펜스도 잊던 풋내기는 어디 가고 한 명의 훌륭한 농구선수가 서 있잖아. 서태웅이 어떻게 그 기회를 놓치겠어. 성공률도 높은데 말이야. 엉엉. 아이고 백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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