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2023)
*줄거리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창작자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게 당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네이버 공식 포스터
2017년 한 소녀가 저수지에 숨진 채 발견됐다.
<다음 소희>는 그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소희라는 한 아이가 학교가 알선해 준 콜센터에 입사하면서 시작된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받는 압박. 복잡하게 연동돼 계산하기 어려운 인센티브. 사측의 편의대로 실습생이었다가 직원이었다가 요동치는 노동자의 위치.
어떤 아이들은 기대 없이 자라난다.
특히 학교에서.
지역에서 일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별다른 기대 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서연고 다음은 인서울, 그다음이 지역대 그리고 그 외 모든 곳.
매번 돌아오는 겨울, 프로그램 대본에 수능 응시자들을 응원하는 방송멘트를 넣을 때마다 이 상황과 전혀 상관없을 나머지 청소년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 아이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소희는 그 아이들 중 한 명이다. 취업률이 중요한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적성이나 재능을 찾기보다 기업에 아이들을 밀어 넣는데 혈안이 돼있다. 애초에 교육부에서 학교를 평가하는 척도가 취업률이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맞닥뜨린 세상은 아이들을 철저하게 착취한다. 소희는 2017년 사건처럼 결국 저수지에서 발견된다. 영화 전반부의 이야기다.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말 것, 관객을 가르치려 하지 말 것, 교훈을 강요하지 말 것. 영화 <다음소희>는 이 모든 것을 다 한다. <다음 소희>는 설명하고 가르치고 분노한다.
영화 후반부는 소희의 죽음을 캐내는 형사 오유진의 이야기다. 유진은 이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관계자들을 찾아다니고 주변인들을 탐문하며 소희가 내달릴 수밖에 없었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와 회사 그리고 교육부와 경찰. 조직적으로 설계된 구조의 문제. 구조의 문제란 역설적으로 아무도 그녀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유진은 분노한다.
영화 후반을 보며 마동석을 떠올렸다. 범죄도시의. 범죄도시처럼 통쾌하게 악인들을 응징하지 못하지만 형사 유진은 분노를 터뜨린다. 고함을 지르고 누군가를 후려치기도 한다. 작품의 결과 만듦새는 전혀 다르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악을 마주했을 때, 분노하는 날것의 감정을 망설임 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기묘하게 닮아있다. 굳이 따지자면 범죄도시는 일종의 장르영화고 다음소희는 사회고발영화지만 그 안에 실은 어쩌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못해 좌절한 의지들이 층층이 쌓여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마동석이 범죄자들을 두들겨 패면서 잡아넣고 유진은 단 한 명의 학생을 위해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하지만 거꾸로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들은 판타지에 가깝다. 현실이 그렇지 않기에 그랬으면 하는 우리의 바람이 투영된. 그래서 영화 속 형사들은 마음껏 수사하고 마음껏 들쑤시며 마침내 일갈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래도 되나 싶었다. 작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좋은 영화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안 하는 게 좋다.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은유나 상징을 활용하고 관객들을 가르치려들기보다 우회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 그리하여 교훈을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 미덕 아니던가.
<다음 소희>는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가감 없이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다. 영화의 작품성을 다소 해치면서까지 감독은 이야기한다. "그러면 안 돼요? 그냥 하면 안 돼요?"
형사 오유진이 자살로 처리하면 쉽게 종결될 사건을 놓지 않고 물고 넘어지자 상관이 그녀를 다그친다. 네가 뭔데 사건을 조사하냐고. 아이러니하다. 사건을 조사한다고 비난받는 형사라니. 그런데 현실은 그렇다. 제대로 뭔가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저런 비난이 쏟아진다.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많은 조직들을 들쑤시며 대체로 많은 경우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많은 비용과 인력을 소모시키기 때문에. 그런데 오유진은 소리 지른다. 누군가의 고소와 고발이 없더라도 형사가 수사하면 안 되는 거냐고. 그러면 안 되는 거냐고.
그래. 그냥 그러면 어떠한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뭐가 문제일까. 사건을 취재하며 감독이 느꼈을 분노가 장면마다 스며든 영화를 보며 관객석에 앉은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미디어에서 지워지는 아이들이 있다. 수능 만점자나 의대를 포기했다거나 명문을 남기고 명문대를 자퇴한 아이들의 이야기는 종종 미디어를 통해 마주하지만 공장으로 실습을 나가고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접하지 못한다.
유독 산업재해가 많이 일어났던 한 해였다. 한 아이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죽음으로만 마주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이야기들이 그들이 속해있는 구조의 앙상한 뼈대가 드러나는 순간, 그 틈에 섞여 들고나서야 겨우 전해진다. 기대 없이 사라지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유지하고 있는 시스템의 하부.
<다음 소희>를 통해 감독은 되묻는다.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 같은 시스템의 민낯을 보여주며 우리는 사실 정작 해야 할 일들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추궁한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다음소희>는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제대로 해야 할 일들을 한다면 가능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한다. 학교가 아이들 개개인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가능성과 미래를 소중하게 다룬다면, 회사가 성실한 노동자에게 적법한 보상을 제공한다면, 형사가 사건을 성실히 수사하고 작은 문제로부터 큰 부조리를 포착해 낼 수만 있다면 춤추고 화내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소희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생동할 수 있을 거라는 단초를 제공한다. 그걸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독은 오유진이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직구로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좀 더 중요하게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무엇보다 배우 배두나를 좋아한다. 영화 외적으로 그녀가 이런 영화들에 개런티 없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나 내용과는 별개로 스크린 안에 그녀란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딘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우리는 너무 많은 문제들을 목도한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이 촘촘히 설계된 구조 속에서 어떨 때는 내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내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어딘가에 좋은 의미로 기부를 하다가도 스스로 일상에서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악행들을 떠올리면 이게 무슨 위선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다 나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피해를 받게 되면 분노에 사로잡혀 위악을 부리기도 한다. 더 나아지고 싶어서 노력하다가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제풀에 스러지기도 하고 그래도 뭔가를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다시 분연히 일어나기도 한다.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의 반복 속에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아, 저기도 사람이 있구나. 연대의 시작은 이런 작은 발견들이다.
개인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낼 수는 없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세상 모든 문제의 해법을 내놓을 리가 만무하다. 때로는 선의에서 한 행동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기도 하고 애초에 100%의 선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할 수나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치거나 힘들어서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그래도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다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배우 배두나에게서 그런 의지를 읽는다.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의지를 지니고 노력하는 타인을 발견하는 것이 큰 힘이 된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비록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은 덜어진다. 아직도 여전히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가치가 남아 있다는 것이,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동력이 자본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힘이 될 때가 있다. 영화 속 오유진의 형사답지 않은 모습들을 바라보며 그런 위안을 느낀다. 형사로서 오유진과 배우로서 배두나가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파괴하며 동시에 두 차원 모두에 존재한다. 듣고 위로하고 연대하는 자로서. 각 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고 말을 건네며.
작품성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문제들이 남아있다. 계층을 다루는 방식. 언제나 이 지점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콜센터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택배 기사로 일하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특정 직업을 재현하고 이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미씽 링크가 발생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스스로가 겪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있어 창작자가 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가 궁금해지는 순간들이 자주 발생한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조차도 이러한 의구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동일한 노동 경험이 없는 외부 관찰자로서 감독이 노동 문제를 다룰 때, 노동자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적절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는 거다. 개인적으로 켄로치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래도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노동과 계급에 프라이드를 지닌 존재로 묘사된다고 생각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나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품격을 결코 잊지 않는 존재로 그려진다. 영국과 한국. 양국의 노동 역사가 많이 다르고 계급이나 계층에 대한 인식도 이질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화 속에서 그려내는 노동 문제과 계층에 대한 묘사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계층이 고착화된 영국과는 달리 한국은 상대적으로 계층 이동이 격렬하다고 한다. 더 나은 계층으로 오르려는 상승 에너지가 역동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멸시도 역으로 심한 편이라고.
그래서 언제나 노동자를 다루는 영화를 보다 보면 궁금해진다. 노동의 문제에서, 노동이야기를 할 때 창작자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의 창작물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 언제나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지인들에게 곧 어느 정치인이 이 영화를 관람하는 행사 비슷한 것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그런 종류의 행사를 하는 게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시 이런 영화관에서보다는 현장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해졌다. 제때에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했더라면. 그런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ps. 영화 내에서는 형사 오유진이 소희를 위해 학교를 찾아가고 해당 업체와 싸우며 이 죽음의 의미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걸로 나온다. 현실에서는 영화 속에서 다소 아이에 무관심한 것으로 재현됐던 부모, 특히 아이의 아버지가 형사 오유진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한 활동가 분의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영화 관람 시 중요하게 인지해야 할 사항인 것 같아서 덧붙인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억울함은 대개 그의 지인이나 가족에 의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