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thing does matter
모든 첫 순간의 반짝거림이 반복되면 경험은 모서리가 마모된다. 익숙해진 수많은 것들의 반복. 왕성하게 모험하며 활동영역을 넓혀나가던 유아기를 벗어나면 인간은 좁아진 생활 반경 속에서 낯익은 이들과 일상을 반복한다. 이 반복은 살만한 곳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대체로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불안감이 스멀스멀 스며들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새벽 4시경(항상 새벽 4시다) 잠에서 깨 침대 위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어.
인간의 수명은 일반적인 생명체에 비하자면 상당히 길다. 짧게 산화하는 삶에 비해 매일을 반복하는 긴 생이란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이 느끼던 그 권태로움을, 그 사치스러운 감각을 점점 더 자주, 더 많이 느끼게 한다. 시간의 파도에 쓸려 풍화되어 노쇠해가는 육체는 우리 안의 모험가를 살해하고, 모험가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노인은 참다랑어를 사냥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생에 목적이란 게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배가 난파되어 방향을 잃고 헤맬 때, 우리를 엄습해오는 감정의 폭풍 속에는 반드시 다수의 후회스러운 결정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많은 선택들이.
가끔은 매우 용감하고 때로는 정의로우며 간혹 사랑스러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하거나 더 자주 비겁하게 도망치고 종종 못된 짓을 저지르는,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하기 힘든 스스로의 결함들이 내린, 바로 그 잘못된 선택들의 총합이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후련한 마음으로 직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대개 우리는 새벽 4시에 깨서.. 이하 생략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이 쓰라리고 거대한 질문에 비해 사랑이란 얼마나 쉬운 해답인가. 가족이란 얼마나 좁은 선택인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였다면 단연코 난 객석에서 숨죽여 울지 않는다(그래 울었다 왜 뭐 어쩔).
수없이 많은 영화 속에서 단지 핏줄이 이어져있다고 해서, 혈연이라는 그 갓뎀 무결한 이유만으로 이웃들을 학살하며 자신의 자식들을 구해내는 서사들에는 사실 진저리가 난다. 샹치는 정말이지 양자경이 출연한다는 것 말고는 절레절레. 이번에도 예고만 봤을 땐, 오해할 뻔했지 뭐야 언니.
every 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이 지점에서 멀티버스를 괴랄하게 사용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가족으로부터 이블린을 떼어내고 동시에 가족들을 그녀로부터 타자화하기 위해 멀티버스를 활용한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마다 우주가 생성된다는 이론 아래서 이블린이 마주치는 그녀의 모든 가족들은 사실상 완벽한 타인이다. 심지어 그녀 자신마저도.
하나의 그릇에 담긴 개체로서 이블린은 수많은 우주 속 완벽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또 다른 삶을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역으로 추적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둘씩 사라져 좁혀진 확률의 문을 뚫으면서. 그녀는 타자이면서 동시에 자아고 자아이면서 동시에 타자이기도 하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모두이며 모두임과 동시에 하나인 셈이다.
이 독특한 감각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멀티버스를 이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이블린은 수없이 많은 또 다른 자신의 타인들을 마주하며 스스로의 삶을 재건한다. 수많은 실패가 불러일으킨 참담한 결과를 직시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수많은 실패가 쟁취해낸 눈부신 결과를 복기하면서.
딸을 구하겠다는 목적은 명료하지만 이것은 결코 모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순전히 이블린의 이야기다. 타자로서의 자신과 세상을 마주하는.
수많은 이블린을 경유하는 고단한 모험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놀랍게도 또다시 다른 타자들을 발견한다. 엑스트라로 등장해 괴상한 즐거움을 주던 이웃들과 그녀의 유약한 남편과 냉정한 아버지. 혈연으로든 서류로든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니든 이블린과 관계 맺은 완벽한 타자로서 주변인들은 이블린의 각성과 더불어 생을 진전시킨다. 엉망으로 꼬이고 망해버린 진창에서 이블린의 어깨에 올라타고, 이블린으로부터 위안을 받으며, 또는 이블린의 회한으로 남기도 하면서 각자의 우주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분명하게 각자의 방식대로 이블린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지나간 일들을 아쉬워하고 상실에 슬퍼하거나 실패에 좌절하면서도 어김없이 들이닥쳐오는 시간을 수용하며 또 다른 선택을 내리고 감내하고 성장한다. 그리하여 궁극에는 완벽한 타자로서 조이와 웨이먼드와 이블린은 생은 전진한다는 대전제 아래 각자의 선택으로 서로의 곁에 남는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 지금의 내가 알파 버전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수많은 악수들을 둔, 형편없는 선택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수없이 새벽 4시에 벌떡 벌떡 알 수 없는 불안과 좌절감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알고 있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우리가 내렸던 과거의 결정들은 사실 전력으로 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내렸던 가장 최선의 것들이었다는 것을, 천문학적인 확률의 길을 뚫고서 오늘의 나를 마주하기까지 실로 고단한 여정을 걸어왔다는 것을 스스로는 이미 알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이 형벌 같은 일상이, 그리고 그 일상을 메우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이 씨실 날실 얽혀서 만들어가고 있는 이 미친 확률의 카오스가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이것이 이블린의 구원이다. 이는 싯다르타가 걷던 구도의 길과 같은 여정이기도 하다. 이블린이 장난감 눈을 이마에 붙이는 순간은 바로 생의 근원을 깨달은 자를 상징하는 개안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극장에 앉아있는 우리로서는 그 누구도 이블린이 공허의 궁극에서 건져낸 깨달음을 알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헤아릴 수 없는 생을 거쳐가면서도
결산할 수 없는 인연을 맺어가면서도
여전히 생의 목적도 생명의 이유도 얽힌 관계의 의미도 무엇하나 제대로 알 수 없는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완벽한 타자들에게, 실은 나 자신과 다름없는 또다른 나들에게 상냥해야한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혼돈과 무지에 대한 인간의 완벽한 투항이자 동시에 완전한 승리의 선언이다. 이블린은 불화하지 않으면서 결국 모든 우주를 구해낸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또 다른 우주의 나를 감각하면서도
또다시 이곳의 나로서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의 역설을
비로소 이해한다.
모든 순간은 중요하다.
#everythingeverywhereallatonce
#에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