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에 가려진 사각지대를 섬세하게 채워 넣는
‘사실 나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이 누구일 거라고 생각해?’
‘글쎄. 어쩌면 의외로 가족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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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식탁을 공유하고 밥을 나눠먹고 잠을 같이 자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가장 덜 들여다보는 대상. 제일 가까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좀처럼 돌아보질 않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지치고 힘들 땐 어떤 짜증을 부리는지,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는 어떤 형태로 감정을 분출하는지에 대한 것들은 세밀하게 알면서도 정작 어떤 꿈을 꾸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고나서는 가끔씩 문득 정말로 엄마는 어떤 사람인 걸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서로 의견이 다르거나 문제가 있어서 싸울 때만이 아니라 정말 평온하게 잘 지낼 때에도. 지금의 내 나이에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있던 여성. 나는 그녀를 만나기 전 그녀의 생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으니까.
유전자가 증명하는 닮은 얼굴, 무척 낯익으면서도 어느 찰나에는 완벽한 타인으로 느껴지는 낯선 선들을 그녀로부터 발견하고는 한다. 그러니까 같이 차를 한잔 마시다가 슬쩍 돌아본 그녀의 얼굴 위로 오후의 빛이 난생처음 보는 선을 만들어내고 있달지 하는 순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모습이 적당히 뒤섞여있는 익숙한 얼굴이 아니라 그 두 사람으로 완전히 수렴되지 않는 미지의 또 다른 얼굴을 응시할 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여백이 무척이나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나의 시작은 분명 그녀였지만 그녀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그런 게 너무 궁금한데 정식으로 '당신의 삶을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사이라 잠시 유행하던 <자신의 부모에 대한 모든 것> 같은 희한한 노트를 사서 드린 적이 있었다. 그 책은 좋아하는 색, 어렸을 때의 꿈, 주요 가치관, 취미나 특기와 같은 시시콜콜한 문답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엄마는 아주 질색을 해서 정보 입수에는 실패했다. 나 같아도 사실 싫었을 것 같다. 문답이라니.
우연히 그녀와 함께 하는 여행길에서 <애프터 썬>을 만났다. 생각보다 긴 비행에서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클릭한 건데 주변에서 몇 차례 추천을 받았었지만 <애프터 양>이 기대보다 좋지 않아서 (두 영화는 아무 상관없다.) 어쩐지 뒤로 미뤄두고 있었던 영화였다. 작은 소녀와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는 한 남자의 여름휴가 이야기. 이코노미 석에서 몸을 구겨가면서 작은 모니터로 보는 영화라 잔뜩 불편했는데도 잔잔한 초반과 따뜻한 터키 풍광이 좋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어느 시점이 지나자 도저히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이렇게 개인으로 다루는 영화를 마주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 보니 그 관계가 모든 것을 잡아먹는 경우도 발생한다. 독자적인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연인으로, 누군가의 동생으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인지되는 사람들. 딱 들러붙은 그 관계성을 발라내어 그가 누구였는지를 복원하는 것은 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작업이나 복잡하게 얽힌 뇌수술을 하는 것처럼 무척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경우 정말로 그 '관계성'이 하나의 정체성이 되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구분하거나 분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하나로 융합되어 버린 부분도 분명 존재하는 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가장 친밀한 관계만이 갖는 사각지대.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매혹적인 낯선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애프터 썬>의 가장 큰 미덕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성에 개인이 매몰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의 시선은 딸로부터 비롯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자신의 아버지는 혈연으로 묶인 관계라기보다 타자에 가깝게 그려진다. 물론 동시에 애틋한 애정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딸에게 좋은 시간을 전해주고 싶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춤을 추고 자신의 나이 또래와 어울리는 게 좋을 나이의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뒤섞여있다. 어떤 사연인지, 어떻게 아이를 가지게 됐는지, 부인과의 관계는 어떻고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들은 모호하게 처리되지만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느끼는 감정들과 감각들은 느린 화면과 함께 차곡히 선형적으로 쌓여간다. 마치 블록을 쌓듯이. 대부분의 영화라면 지루하기 쉬워져 덜어내는 장면들이 마치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제거되지 않고 살아남아 느릿하게 극을 이끌어간다. 음식을 먹고 수영을 하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리얼타임으로 느껴질 정도로 일상의 속도로 붙여있는 편집. 함께 보내는 시공간 속에 서사가 아닌 감각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쌓아간다.
누군가를 책임지기에는 아직 서투른 청년은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대한다. 부인과는 이미 이혼을 했고 새로운 연인과의 관계 역시 좀처럼 잘 풀리지 않았고 사업도 시원치 않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은, 아마도 성공한 인생과는 거리가 먼 듯한 이 청년이 느끼는 막막함은 그를 지켜보는 어린 딸의 시선을 통해 고스란히 화면으로 전달된다. 그녀의 아버지가 겪고 있는 일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도 없고 또 그녀 자신 역시 성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또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딸의 시선은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이라는 모순된 성격을 드물게 성공적으로 성취한다. <애프터 썬>은 그러니까 한 사람의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 두 사람 모두의 성장 드라마인 셈이다. 그것도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성에 잡아먹히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 존재로서 두 사람이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발생하는 성장. 그것의 결말이 꼭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것마저도 담담하게 수용하게 하는.
녹록지 않는 인생을 지나가면서 분명 이 젊은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 깊숙이 존재하는, 소중한 마음을 자신의 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딸 역시 그녀의 아버지가 지니고 있는 상흔의 흔적을 미약하게나마 발견하고 그것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녀만의 방식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카메라의 시선은 이들의 개인적인 관계성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이는데 영화 전체가 딸아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도 그와 그녀가 함께 있는, 이를테면 잠을 청하는 두 사람의 실루엣을 풀샷으로 담아내거나 하는 방식으로 시점을 스위칭시킴으로써 이 이야기는 결코 두 사람의 관계성 안으로만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개인이 각각 관찰되는 동시에 관찰하는, 다시 말해 2인의 생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약을 하든, 못된 남자를 만나든, 인생에 어떤 험난한 일들이 생기더라도 자신에게는 어떤 일이든 털어놓아도 된다고 당부하는 그는 자신에게도 역시 상냥하지만은 않았던 스스로의 생을 떠올렸던 게 분명하다. 보호받지 못하고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던, 수없이 많은 기대를 저버리고 더 많은 약속을 깨뜨렸던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나 좀처럼 거저 주어지지 않는 행운과 어떠한 약속도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아이보다 먼저 시작된 자신의 삶을 작고 소소한 성취와 그보다 더 많은 실패로 점철시켜나가고 있는 개인으로서 시시각각 마음을 잠식해 오는 우울과 불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잘 모른 채로 그는 어린 딸에게 약속한다. 너의 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에게 이야기해 줘.
그건 아마 그야말로 가장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할 수 없었던 일이지 아니었을까. 사람은 자신의 우울을 다루는데 제일 형편없으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에는 기민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이 죽어가는 소리에는 무심하기도 하니까.
우리는 <애프터 썬>이 보여주는 느린 시간 감각과 더불어 서서히 고통받는 한 청년의 영혼을 들여다보게 된다. 핸드헬드로 불안하게 움직이는 캠코더를 통해서. 그것은 소녀의 시점이 아니라 젊은 청년의 시점이다. "어렸을 때 뭐가 되고 싶었어?"라고 묻는 소녀의 질문에 잠시 오프 되는 캠코더. 그의 꿈이 무엇이었을지, 그가 어릴 적 꿈꿨던 삶이 지금의 모습과 비슷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로지 그와 그의 딸만이 공유한 비밀일 것이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가장 친밀한 관계만이 갖는 사각지대를 여름휴가라는 특별한 기억으로 채워 넣었을 것이다. 딸과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외롭고 불안하지만 동시에 사랑하고 사랑받는 개인과 개인으로서. 가장 독점적이고 내밀한 위치를 내어준 대상에게만 보여주는 어떤 비밀 같은 것들을 소중히 담은 채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오랫동안 딸아이가 지나간 공항의 좁은 복도를 떠나지 않고 돌아보던 청년의 마지막 눈빛은 어딘지 처연하고 애틋해서 그가 간절히 바랐던, 딸아이가 그처럼 험난한 시기를 홀로 헤쳐나가는 동안 자신이 곁에 있을 거라던,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그 모든 아픔과 슬픔을 공유해도 된다고 했던 그 약속을 그 역시 지키지 못했을 거라는 예감을 하게 한다.
닫힌 캠코더. 예전의, 어쩌면 지금의 그녀와 비슷한 나이의 한 청년에 대한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는 여성은 당시에는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여백을 이제는 자신의 경험에 유추해 채워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서투른 청년이었던,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닮은 흔들리는 인간으로서의 개인이 그 안에 담겨있다. 친밀함이 가렸던 사각지대를 섬세하게 발굴해 낸 두 영혼의 공명이 이 영화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게 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 독자적인 시점을.
그게 정말 큰 위로가 되더라고.
외롭고 쓸쓸하지만 동시에 충만하고 아름다운.
개별적 존재로서 당신과 내가 함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