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단계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을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의 절대다수는 내 의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특히 신경증 관련 병이 나를 뒤덮고 있을 때는 더욱더 그렇다. 병중에 이것을 잊고 산다면 무의식의 습관이 선택한 것들을 마치 내가 의식해서 한 것처럼 느끼게 되고 그것은 자괴감의 원인이 되어 우울증의 초석이 된다. 내가 100% 내 의지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공식이 정해진다는 것 또한 무의식(습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다. 공식이 정해지고 그 퍼센티지가 99%에 가까울수록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무의식을 훨씬 더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내가 가진 모든 사고와 행동의 습관인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알다시피 습관은 고치기 어렵고 병중에는 더욱더 쉽지 않다. 사고도 행동도 그 공식(습관)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뇌가 나의 몸뚱이를 지키기 위한 본능으로 계산값을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병을 낫기 위한 마음을 먹었을 때 그동안 나의 의지와 의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이전의 나는 그것을 인지하지도 못했다. 내 의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다음 단계인 인지하려고 애쓰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증상의 전반적인 단계를 인지하는 것이 이해의 첫걸음이다. 내 경험상 이병은 단계만 있을 뿐 그 순서는 없다.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서 이병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을 떠올리면서
불안의 단계를 아래 그림으로 확인해 보자.
불안의 단계
이것은 단순히 내가 느끼는 불안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절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색으로 구분해 놓은 것은 실제 뇌가 저런 색으로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쉽게 내가 느끼는 증상을 정도별로 구분해 놓은 것일 뿐이니 참고하길 바란다.
아래는 단계별로 내가 느꼈던 상태와 증상들이다.
0단계
불안이 없는 일반적인 상태 공황장애 이전-안정적이고 편안한 상태
공황장애 이후-0단계를 느끼지 못한다.(불안장애 이후에도 마찬가지)
1단계
불안이 있지만 잘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 공황장애 이전-걱정이 많고 민감하며 겁이 많음(두통이나 과민성대장증후군을 동반한 컨디션저하와 무기력)-이 상태를 기본값으로 착각하는 시기
공황장애 이후-걱정이 많고 민감하며 겁이 많음+증상에 대한 거부감(두통이나 과민성대장증후군을 동반한 컨디션저하와 무기력+폐쇄적인 곳에 대한 회피나 생활 속 작은 불편들)-이 상태를 기본값으로 착각하는 시기
2단계
불안이 드러나며 온갖 증상에 시달리는 상태 공황장애 이전-1단계+알 수 없는 불안감+비현실감+호흡불편+우울감
공황장애 이후-1단계+불안감(증상에 대한 거부감이 유발)+비현실감+호흡불편+우울감+수면장애, 힘 빠짐, 열감, 온몸 긴장, 어지러움, 상식을 벗어나는 과도한 재앙적인 상상의 반복, 이후에 벌어질 힘든 증상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 무기력과 자살사고 등등
3단계
공황상태 공황장애 이전-과호흡, 식은땀, 쓰러질 것 같은 힘 빠짐, 나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 불안 초조 도망가고 싶은 기분
공황장애 이후-과호흡, 식은땀, 쓰러질 것 같은 힘 빠짐, 나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 불안 초조 도망가고 싶은 기분
4단계
공황발작 상태 공황장애 이전-3단계+(심장이 멈출 것 같음, 주마등, 정신줄을 놓을 것 같음, 기절할 것 같음, 죽음을 떠올림->응급실)
공황장애 이후-처음 공황발작 이후 겪은 적 없음
내가 정상일 때도 1단계는 왔다 갔다 했다.(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1단계 언저리였던 것 같다.) 공황장애 이전에 불안하다고 하는 것은 그냥 형용사 같은 것이었다. 단순한 긴장감의 연장선일 뿐 환우일 때 느끼는 불안과는 아예 달랐다. 이전엔 불안이라고 해봐야 아무리 심해도 일상생활에서는 1.5단계 정도였고 환우들이 흔히 불안하다고 말하는 2단계 이상의 그것을 본격적으로 느낀 것은 공황발작이 있기 3년 전부터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불안장애였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 4단계인 발작을 겪은 이후 진돗개가 발령되면서 나는 공황장애 환우가 되었다.
공황발작의 상태(진돗개 발령)
간혹 일반인들 중에도 3단계까지 겪는 분들도 계시지만 모두가 그 경험으로 공황장애가 생기진 않는다. 3단계를 겪고도 공황장애나 불안장애로 확장되지 않는 이유는 그 증상의 순간 인지오류를 겪지 않았고 그로 인해 두려움을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지나가는 증상인 것을 알고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
3단계에 인지오류를 겪지 않았다면 4단계는 당연히 오지 않고 3단계도1회성으로 끝나며 0단계로 금방 회복한다. 하지만 나는 몇 번의 3단계를 겪으며 결국 인지오류를 일으켰고 곧바로 4단계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 공황발작의 순간이 되었다.
공황발작은 분명 4단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공황장애라는 것은 결국 0단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1단계에서 4단계를 왔다 갔다 하는 상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비상사태 유지
나는 그 공포가 너무도 강렬해 순간 뇌에 비상사태라는 공식이 새겨졌고 그것이 공황장애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는데 실제로는 없는 말이겠지만 나는 공황장애가 공황발작 PTSD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그 상태를 느끼게 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 별거 아닌 일상의 작은 느낌이나 증상에도 발작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져서 두렵고 내 온몸은 그로 인한 각종 증상들로 인해 일상생활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1~3단계를 오르락내리락하던 나에게 공황발작은 위험하다는 확신을 주는 진돗개 발령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 병을 오래 겪으며 공황장애는 0단계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다 나은 것 같을 때에도 대부분 1단계에 머물렀다. 증상은 없어도 분명 일상의 몇몇 회피를 안고 살아 간다. 아마도 비행기나 잠수함등을 평범하게 이용할 수 없고 여행을 가기 전에 일반인들처럼 들뜨기만 할 수도 없다. 꼭 비행기가 아니더라도 지하철이나 극장, 터널 같은 곳이나 교회 같은 의외의 장소를 불편해하기도 한다. 공황장애 환우가 아니라도 평소 민감하며 걱정이 많고 그로 인해 소화기관이나 두통을 겪는 분들도 2단계로 가지 않았을 뿐 1단계에서 0단계로 가지 못하는 분들일지도 모른다. 나의 10대~20대까지가 그러했었고 0단계는 어쩌면 그때부터 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내 경우 4단계(공황발작)를 겪고 나서 몇 년에 걸쳐 1단계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며 알게 된 것은 증상이 심하든 약하든 상관없이 이 흐름은 그 기간만 달랐을 뿐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공황장애의 시발점
1단계에 머무르게 되면서 나는 병이 다 나은 것처럼 착각하고 한 두 개의 불편쯤은 감수하며 그 시간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2단계로 올라가고 점점 증상이 확장되면서 뭔가 잘못됐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공황장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병은 오르락내리락 파동을 그리며 내 인생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0~4가 절대적인 순서도 아니었다.
4단계가 상대적으로 가장 횟수와 시간이 짧았고, 3단계도 느끼는 시간은 짧았으나 며칠 또는 몇 주에 걸쳐 하루에 수회를 반복하기도 했다. 1단계에 오래 머물다가도 순식간에 3단계로 진입 하기도 하며 그 이후에는 2~3단계를 오락가락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 이유는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이 나를 삼키며 무기력을 동반한 우울증까지 보탰졌었기 때문 이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것도 힘들었지만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다시 반복될 것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2단계가 짧게는 몇 달에서 몇 년간에 걸쳐 진행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2단계의 임계점에 도달하면서 자연스럽게 1단계로 가게 되었는데 그 사이 커다란 인지오류를 동반한 사건을 겪게 된다면 1단계로 가던 도중 3단계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멀쩡하던 사람(최소한 1단계였을 것이다.)이 공황발작(4단계)의 순간 큰 충격으로 공황장애가 되기도 하고, 공황발작이 없이도 평소의 긴장(1단계)이 습관처럼 쌓이다가 3단계를 경험하면서 공황장애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저 단계들이 인지오류를 일으키지 않는 어느 한계까지 올라가면 내려오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한번 발령된 진돗개는(1단계~4단계) 철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상사태의 뇌회로는 최대한 빠르게 위험을 판단하기 위해 작은 증상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반응들까지도 민감하게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안전이라는 선택을 유도하기 위해서 뇌가 나에게 보내는 강렬한 신호(느낌)들은(비상사태이므로) 결국 내가 느끼는 수많은 증상들로 나타나며 수많은 것들을 회피하게 만든다.
공황장애 공식
공황장애=비상사태=크고 작은 불안의 무한 반복
공황장애이후의 시발점은 0.5초의 매순간이다.
증상들은 나에게 비상이다!!!!! 라고 외치며 내가 인지오류를 겪게 만든다.
1단계 "야! 뭐야?"
2단계 "야! 뭔 일 났는데? 뭐야? 뭔데? 위험한 거 아니야?"
3단계 "야! 뭔 일 났는데? 뭐야? 뭔데? 위험한 거 아니야? 죽을지도 몰라 어떻게?
4단계 "죽는다. 통제불가로 미친다. 기절한다. 응급실"
공황장애는 발작 그 이후 나의 뇌에 진돗개가 발령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외부의 모든 것들을 위험 공식 99%로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실체 없는 두려움의 공식은 끊임 없이 양산 된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철회되지 않으며 철회된다 하더라고 금새 다른 구실을 찾아 공식을 체결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런 이벤트가 없이도 1~4단계를 오간다는 것이 포인트다. 저 상태가 아무런 실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려움의 이유는 실존하지 않고 내 안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인데도 나는 외부에서 눈에 보이는 이유를 가져다 대었었다.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찾기 편하며 그럴싸했고 답을 찾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가지의 인지오류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느끼는 증상들의 원인은 평범하게 일어나는 작은 느낌이나 기분을 곧바로 위험이라고 판단하는 사고오류이지 외부 요인이 아니었고 그것이 공황장애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단계가 다시 높은 곳으로 돌아갈 일 없이 실질적으로 낮아지게 되는 첫 열쇠가 되었다.
어떠한 이벤트가 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증상이 확대되는 원인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오랜 시간 불안에 떨고 증상으로 몰고 가는가? 그렇지 않다. 외부 요인을 공황장애의 원인으로 둔다면 이 병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지구인으로 살고 있다면 외부 이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피할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스트레스받는 일이나 그로 인한 작은 신체변화 같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흘려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했다. 이 병이 걸리기 전처럼 말이다.
핵심요약
공황발작은 분명 4단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공황장애라는 것은 결국 0단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1단계에서 4단계를 왔다 갔다 하는 상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공황장애=시발점의 연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