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대고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그분을 원망하지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울며불며 매달리지도 않았다. 괜찮았다. 놀라지 않고 괜찮을 수 있었던 건 나의 무지함 때문이다.의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순간 공기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조직 검사를 해야 합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조직 검사가 무엇인지 모르고, 왜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당시 스물여섯이었고, 가족이나 지인 중에 암 환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진단 받기 두세 달 사이 몸무게가 20kg이나 늘었다. 나는 단순히 먹는 걸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원래도 10kg 정도는 쉽게 늘고 줄어드는 체질이라, 살이 쪄도 금방 빠질 거라고 가볍게 여겼다. 병원에 가기 두 달 전부터 숨이 차 침대에 반쯤 기대에 자야 했음에도, 그저 다이어트를 하라는 신호인가 보다 하고 계획만 세울 뿐, 정작 실천은 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월말이라 아직 마감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고, 그것을 끝내고 가겠다고 말했다. 의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거기 회사 사장님한테 전화해서 저 바꿔주세요! 마감은 무슨 마감이야, 지금!"
그때까지도 몰랐다. 내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될 줄은.
몇 차례 따끔한 말을 들은 후,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와 함께 상급병원에 도착해 소견서를 보여주자마자 곧바로 입원이 결정되었고, 검사가 시작되었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의료진은 내 폐에 물이 1리터 이상 차 있다고 말하며, 그동안 어떻게 버텼냐며 걱정 어린 타박을 했다. 나는 앉은 상태로 등에 바늘을 꽂은 채 폐에 고인 물을 빼기 시작했다. 1리터 병을 다 채우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기절하고 말았다.
분명히 엄마랑 웃으며 병원에 들어왔는데 한순간, 내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환자가 되었다. 다음날 조직 검사를 하러 가야 한다고 선생님이 나를 침상에 누인 채로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 분위기가 무서워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라고 엄마가 말해주셨다.
”소, 라니, 엄마, 딸이야 정신 차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끅끅 웃어댔다.
환자인 채 열흘의 시간이 흘러, 희귀암 3기로 진단받았다. 왜인지. 마냥 슬프지 않았다.
어릴 적, 우리 아파트에는 또래 친구가 없어서 청소하시는 아줌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맞벌이로 고생하시는 부모님과의 추억은 많지 않았다. 이제서야 엄마랑 종일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엄마랑 매일 웃고 장난치는 나에게 인턴 선생님은 와서 말했다.
”본인 병이 얼마나 위중한지 몰라요?! 퇴원하면 생존율이 얼마나 되는지 검색해보세요!“
주변 사람들은 검색하지 말라고 했다. 희귀암이라 전국적으로도 사례가 드물었고, 생존율도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우리 집에서 누군가를 데려가셔야 한다면, 나를 데려가는 게 맞다.’ 그렇게, 하늘의 그분과 대화를 마친 상태였다.
‘제일 먼저 무얼 정리해야 할까.’
일단 빚이었다. 엄마에게 독립을 선언하며 빌린 이천만 원. 갈 때 가더라도, 꼭 갚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다음은 장례식 준비. 어떤 음악을 틀어둘지 고민했고, 영정사진도 요즘은 반명함판 사진 대신 자연스러운 모습이 유행이라, 나도 연예인들처럼 자연스러운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수의를 생각하니, 전통적인 삼베옷은 일제의 잔재라 입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룰루레몬 운동복을 입기로 했다. 꽃도 국화는 너무 흔해서 싫었고, 연한 분홍색 장미로 장식해달라고 했다.
내가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우리 딸은 끝까지 많이 쓰고 가는구나."
나는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럼 제가 쓰던 거 마저 써보겠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는 것처럼,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서 내 장례식이 마냥 슬프기만 한 자리가 되지 않길 바랐다.
엄마와 자주 장례계획을 의논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눈물을 보이셨지만, 나중에는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내 앞에서만 울지 않았을 뿐, 멀리서 사는 이모와 통화하며 너무 많이 울었다고 했다. 결국, 이모는 한달음에 엄마를 보러 달려오셨다. 나보다도 엄마의 건강이 걱정되었다고.
매일 밤, 엄마는 병원 로비의 의자에 앉아 묵주를 돌리시며, 흔들리지는 않는 목소리로 기도하셨다. 단 한 번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은 채.
‘내가 뭘 잘못했길래 우리 딸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거냐?’ 하며 원망했을 법도 한데,
엄마는 그저
‘더 늦지 않게 병원에 올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앞으로 평생 누워만 있어도 내 곁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하늘을 원망하며 자책하는 시간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기도해 준 것이 그저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