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있는 털이 다 빠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속눈썹까지. 뭐든 잃어봐야 속을 안다더니 속눈썹의 중요성을 그때 깨달았다. 아침마다 손가락을 빌려 눈을 떠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베개 가득 머리카락이 빠져있었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후두둑 떨어졌다. 정말 영화같은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긴 머리였던 나를 본 지인이 ‘긴 머리카락이 빠지면 충격이 클 것이니 미리 컷트를 해보는게 어떻냐’는 제안에 나쁘지 않겠다 생각되어 미리 잘라 놓은 상태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그날 오후 엄마랑 삭발을 하러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밀고 있는데 뒤에서 어떤 손님이 엄마에게 물었다.
“어머! 아줌마 딸 왜 저래요? 여자애가 머리를 왜 밀어~”
모두가 들었지만 다들 조용했고 엄마는 울었다.
약물로 인한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주일간 하루에 한 시간씩 자며 고통이 극에 달했다. 통증보다 불면증 때문에 더 힘들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수면제를 타러 정신과에 갔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의사 선생님은
“본인은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어요. 그래서 스트레스가 커요.”
맞다. 나는 암 환자가 뭔데? 하며 그저 가족들이 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회사생활에 지친 내가 유일하게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다며 마냥 좋아했다. 항암제가 들어가도 삼일정도는 멀쩡해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 닥칠 폭풍우는 감히 상상도, 생각도 못 했던 것 이다.
삼일이 지나자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처음 겪어본 통증에 나는 정신과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매일 기어다녀야 했고 관절 마디마디가 너무 아파서 엄마와 아빠는 밤새 나를 주무르다가 출근하셔야 했다. 한참 통증을 견디다가 예약일에 병원으로 향했다. 대기실에서도 눈물이 주룩주룩 나왔다. 너무 아파서 앞에 지나가는 팔이 없는 사람을 보면서 차라리 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울어서인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환자들이 진료 순서를 다 바꿔줬다. 이런 일이 있구나 본인들도 힘들 텐데 너무 감사했다. 그때, 간호사 선생님이 오시더니
“어머니가 너무 우셔서 앞에 환자분들이 순서를 미리 해줄 수 없냐고 물어보셨어요.”
그제야 나보다 더 아파하고 있고 소리도 내지 못 하며 내 뒤에서 울고 있던 엄마가 보였다. 매일 장난치고 괜찮을거라고 용기를 줬던 엄마가 얼마나 슬퍼하고 있었는지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끈기가 없어서 못 견뎌낼 것 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불같이 타올랐다가 금방 지쳐 포기해버리는 성향을 지닌 내가 어떻게 이 힘든 과정을 버틸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드셨다고 했다. 이번만은 먼저 끈을 놓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했다.
진료를 빠르게 마치고 응급실로 가서 진통제를 맞고 입원을 준비했다. 두 시간 후 서류를 들고 입원실로 향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입원 수속을 밟아야 한다며 환자를 데리고 신체검사를 하러 갔다. 근데 내가 아닌 엄마를 모시고 가는 것이다.
“선생님, 제가 환자인데요”
“네, 보호자님은 거기 계시면 됩니다. 제가 모시고 다녀올께요”
아주 친절하셨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엄마를 모시고 갔다. 순간 눈앞에 물음표가 떠다녔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들었다. 엄마는 작고 왜소한 체격을 지녔고, 나는 할머니의 유전자 덕분에 덩치가 큰 편이라 그 누구도 환자라 보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카락이 빠지고 얼굴이 퉁퉁 부었어도 전문가가 보기에도 환자로 보이지 않았던 것 이다. 다시 천천히 설명하니 화들짝 놀라며 연신 죄송하다고 하며 나를 데리고 갔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고열로 인해 찾은 응급실에서 환자 팔찌를 엄마에게 채워주려고 한 적도 있었다. ‘84년 이가연님‘을 찾으며 확인하길래 ’여기요‘ 라고 손을 들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엄마에게 팔찌를 채워주려 했고, 엄마는 또 자연스레 팔을 쭉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힌 나는 ’그쪽은 56년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놀라는 표정을 지은 간호사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어디가 문제일까.
엄마랑 나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만들어졌다며 얼른 아빠한테 알려주자고 병실로 향했다. 함께 왔던 아빠는 어제 과음 탓으로 잠깐만 자고 일어나겠다며 나보다 먼저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빠 일어나~ 거긴 내 침대야 창피하니까 일단 간호사 선생님이 왔다 나가면 다시 누워”
“보조침대보다 여기서 10분 자는 게 더 편해 잠깐만 기다려줘 술 좀 깨볼게.”
아빠는 끝까지 버텼다. 엄마와 나는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냐며 전에는 검사하고 돌아오니 할머니가 누워있더니 이번엔 아빠다. 이렇게 가족들도 환자 취급을 안 해주니 다들 모르는 게 당연하다며 웃고 떠들었다.
사실 나는 경과가 좋지 않은 환자였다. 처음에도 치료 시기가 늦어서 수술은 못 하고 항암제로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항암제 투여 후 1차 빼고는 계속 상태가 좋아지지 않고 있었다. 해볼 수 있는 건 다 하는데도 그사이 일곱 군데로 전이가 되었고 이제 장기 적출을 논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지금 신장 하나를 떼면, 몇 년 후부터 계속 투석 해야 하는데 너무 어려서 논의 중입니다.
투석 시작하면 생존 기간이 10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엄마는 바로 가족들과 의논을 하고 다른 병원으로 전원시킬 준비를 했다. 그 당시 병원에서 아주 난감한 환자였던 나는 의사 선생님께 다른 병원을 가보겠다고 하니 바로 그렇게 하라며 서류를 준비해주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병원을 옮기게 되었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새로운 병원에서 재검을 한 것도 아니다. 기존 병원에서 떼어간 서류로 판독만 다시 한 것 뿐인데 병명이 달리 나왔다. 오진이었다. 그래서 낫지 않고 뼈와 신장까지 전이가 되었던 것이다.
사실 엄마의 촉은 대단했다. 처음 치료를 시작하기 전, 엄마는 다른곳에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지만 나는 여기도 대학병원이고 부모님이 왔다 갔다 하시려면 여기가 낫지 않겠냐며 엄마의 설득을 거절했었다. 병원에 상주하고 계시는 수녀님께서도 어차피 수술이 안 되는 몸이니 치료제는 우리 병원이 낫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때 엄마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오진이라는 말에 화가 나서 그동안 냈던 병원비를 다 받아낼 작정에 소송에 들어가자고 했다. 이상하게 이 병원에서는 보험처리가 안 되는 항목들이 너무 많았고 방사선 치료비라도 받아내게 변호사 선임을 하자고 하니 엄마는 대꾸했다.
“그 돈 찾으려고 네가 스트레스 받느니, 그냥 없는 셈 치고 살자. 괜찮아.”
기존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바로 마친 후라 두 달간의 휴식이 필요한 시점인데 전이 속도가 빨라서 바로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