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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 Oct 29. 2015

낭만, 비오는 수요일

서른,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009


비가 오면 생각난다. 꼭 비가 오지 않아도 생각난다. 어떤 수요일이면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꽃 집 앞을 지나갈 때면 꼭 생각난다. 비 오는 수요일이면 꽃 집 앞에서 꽃 한 송이를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어릴 적, 그랬다. 느리게 걷고 싶었고 어른들의 빠른 걸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씩 자라면서는 낭만이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느린 것 그리고 낭만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0교시라는 것에 시달려야 했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미덕이라 했었다. 그 시절 낭만이라 할 만한 걸 떠올리자면 좀 당황스럽다만 어른들 몰래 마시던 소주랄까, ( ...) 이런걸 낭만이라 하긴 좀 그렇다. 약간의 방황과 일탈, 불량의 어디쯤 정도로 제목을 붙여 본다면 또 몰라. 어쨌든 고등학교를 어영부영 다니다가 뚜렷한 목표가 없어 대학도 어영부영, 그러다가 무슨 오기인지 갑자기 편입을 하겠다고 무척이나 즉흥적으로 결정해서 실행에 옮긴 까닭에 20대의 시작은 빠르고 바쁘고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때 아주 낭만이 없던 것은 아니고 학생회라는 것을 개편하는 신흥 주자가 되어 (학생회장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지 아마) 학교 안에 다양한 이벤트들에 관여하면서 즐거웠다면 조금은 낭만스러우려나.


그래도 중학교 때 까지는 선량하면서 나름의 낭만이 있었다. 친구 집에 삼삼오오 모여서 싸구려 피자를 시켜먹으며 만화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시시덕 거렸다. 누구네 집 나무에 열린 빨간 구슬 같은 열매도 따 먹고, 계속해서 들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미궁이라는 노래를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아 듣고는 괜히 소름 돋아 얼른 꺼버리고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도 지금 생각하면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이 있는 것도 낭만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니 낭만이라 해야지.


느리게 걷고 싶었고 어른들의 빠른 걸음을 이해 못하던 건 국민학교 때였다. 초등학교 때인지도 모르지. 국민학생으로 3년 초등학생으로 3년을 다니고 졸업했다. 어쨌거나 초등생이거나 국민생이던 그 때 이야기다. 수업시간이었는데, 수업을 하지 않는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좋은 말을 하라고 했는지, 마음 따뜻한 말을 하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손을 들고 각자 한마디씩 그럴듯하게 멋있는 말을 했던 것 같다. 평소에는 손을 잘 들지 않던 친구가 손을 들었다. 그 아이와는 제법 친했다. 나는 그녀가 그리는 만화를 충실히 보는 애독자였다. 소근소근 조용한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비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사세요.
그럼 사랑이
이루어진대요.



이름도 예쁜 국화가 말했다. 비오는 날에 예쁜 꽃, 장미를 사라고 했다. 희미하지만 산뜻했던 기억, 친구 목소리가 조근조근 울리기를 마친 교실은 이내 "오오오오오오" 하는 저음의 환호성으로 메워졌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되고, 뜸해지는 연락을 아쉬워 했지만 시간과 공간을 같이 공유할 수 없음은 어쩔 수 없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던 20대, 가끔 생각나서 꽃집 앞을 서성이기도 했다. 단지 꽃을 살까 말까 망설이느라 그랬다. 줄 사람도 없으면서 ...


꽃을 사면 낭만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여전히 주머니는 홀쭉하다만, 그래도 여전히 가끔 아무 목적없이 단지 갖고 싶어서 꽃을 사들고 집으로 가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홀쭉한 주머니라서 아직 그래본 적이 없다.그래도 좀 컸다고 꽃 선물을 종종 하게된다. 그리고 나에게 인생을 사는데 있어 낭만을 알게 해준 모두를 생각한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수요일은 아니지만 생각나서, 그래서 끄적인다.


사족이지만 덧붙이고 싶어 붙이자면 블로그 필명도 낭만이다. 낭만 있게 살고 싶어 그렇게 적어뒀는데 그다지 낭만 없는 인간, 그래도 가끔은 꽃을 선물하고 싶고 선물 받고 싶다. 오늘도 그렇다.








이번 글만큼은 낭만 있어 보이려고 첨부하는 사진 몇 장, 도쿄에서, 2011


무지개 빛이 도는 장미 꽃 냄새를 맡아볼 걸 그랬다. 색감에 빠져 사진 찍느라 바쁘던 그때 (in 도쿄 어느 꽃 집 앞에서)
여행 갈 때마다 비가 온다지. 나는 비를 몰고 다닌다 (도쿄의 비오는 거리, 게야키자카의 카운터보이드, 아사쿠사)






덧,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꽃 한송이 사세요 : )

역시 사족이지만, 이번 글은 특별히 좌우정렬을 하지 않았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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