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러브스토리의 현실은 이래, 그러니 꼭 붙들어 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더라. 있는데, 정리를 한단다. 정리를 하는데 뭔가 뜸을 들인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쉬워하기도 하고 어찌할지 몰라 고민하는 남편을 보며 속이 탄다. 더 웃긴 건 내가 그 여자를 만나도 된다고 허락을 해줬단다.
마지막에 이상했지? 그래, 꿈이다. 꿈에서 그랬다고. 물어보고 만날 리도 없고, 물어본다고 흔쾌히 오케이 할 리도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말을 아끼고 툴툴대다가
남편, 니가 바람났잖아
했더니, 어쩐지 그래서 아침부터 냉소적이었냐며 깔깔깔 웃는다. 우리는 어느덧 연인이라기보다 육아 메이트, 꽁냥꽁냥 연애 감정보다 어쩐지 동료애가 더 사무치는 4년 차 부부다. 한참 뒤에나 생각났다. 께름칙한 꿈의 정체는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때문이다.
책에서 남자 주인공이 단단히 바람이 나는데 아닌 척했지만 한 편으로는 심각하게 생각했나 보다. 꿈에서 남편이 바람이라니.
원래부터 독서 편식이 있었지만, 아이 둘 쫓아다니고 대충이라도 집안 살림을 보다 보니 나의 독서 편식은 여전하면서 오히려 심해졌다. 이렇게 편식이 지속적인 이유는 이제는 그나마 읽기라도 하는 게 황송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다.
가끔 읽는 소설이라지만, 이 또한 편식의 늪에서 철벅철벅이다. 어느 순간부터 알랭 드 보통, 이 아저씨 책만 읽고 있더라. 그래도 좋다. 일단 보통씨의 책을 먼저 다 읽어보고 그다음 애정 하는 작가를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책을 다 읽고 뒷 장에 붙어 있는 하드커버를 덮으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책을 다 읽으면 한글문서 '문장 수집'에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브런치에는 간단한 감상과 함께 수집한 문장을 함께 기록한다.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판을 꼭꼭 눌러 찍으며 세 번, 네 번 다시 읽었다.
여하튼 그는 사랑에 관한 낭만적인 관념을 지탱하는 핵심 과제 세 가지를 족히 통과했다. 사람을 제대로 만났고,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녀가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P 27-28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그 둘은 결혼을 했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전부다. 많은 이야기들은 결혼 그 이후 둘의 삶이 얼마나 처절한지, 가끔은 지질하고, 가끔만 사랑하고, 자주 다투고, 그러다가 또다시 평생 사랑만 할 것 같다가도 현실이라는 문제 앞에 작아지고 서로를 어떻게 외면하는지 이런 자질구레 잡다한 이야기는 깨끗하게 생략되어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생략된 이야기의 일부를 끄집어내서 이렇게 지질할 수 있고, 이렇게 폭력적일 수 있다고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통해 말한다. 그럼에도 이 마저도 일부이며, 더욱 지저분한 현실이 존재함에도 소설은 어느 정도 낭만적 장치로 포장되어 있음도 독자는 눈치채야 할 것이다.
눈물이 날 것 같았던 이유는, 이 소설이 낭만을 장착하고 왔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라는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너무도 잘 알려줘서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한참을 그런 삶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는 한 번도 떠올릴 필요도 없던 문제들에 치이는 일상 말이다. 빨래를 널고 개고, 설거지 통에 설거지가 많고, 기저귀를 갈아주다 아이가 이불에 쉬를 했고, 미세먼지가 많아서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할 수 없고, 저녁 찬거리가 없고, 찬거리가 없는데 돈도 없는 그런 문제.
그리고 이건, 내가 그토록 연애하고 싶어 하는 이유다.
결혼의 시작은 청혼이 아니고, 심지어 첫 만남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사랑에 대한 생각이 움틀 때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맨 처음 영혼의 짝을 꿈꿀 때다. P 12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비행기 옆자리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관찰자에게 언뜻 비친 듯한 누군가의 완벽함이 평생토록 유지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P 15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P 16
이들 부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지금 골몰해 있는 중요한 질문에 답해본 일이 없다. "한동안 결혼 생활을 해보니 어떻던가요?" P 18
라비 자신도 알고 있듯이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중략) ,어떤 짐작할 수 없는 이유로 ㅡ 어쩌면 현재 얽혀 있는 다른 관계나 경계심 많은 성격, 신체 장애나 심리적 억제, 종교상의 의무나 정치적 차이 때문에 ㅡ 그를 잠시 동안 애태우는 사람이다. P 25
그들이 우리를 항상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그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기회가 도처에 널려 있을 때가 아니라 평생 서로의 포로가 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나눌 때이다. P 27
여하튼 그는 사랑에 관한 낭만적인 관념을 지탱하는 핵심 과제 세가지를 족히 통과 했다. 사람을 제대로 만났고,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녀가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P 27-28
사랑이란 우리의 약점과 불균형을 바로잡아 줄 것 같은 연인의 자질들에 대한 감탄을 의미한다. 사랑은 완벽을 추구한다. P 30
라비의 사랑은 약점을 보완해주는 강점들과 자신이 열망하는 자질들을 발견한 것에 대한 논리적 반응이다. 그의 사랑은 불완전하다는 느낌에서 완전해지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다. P 30
사랑은 우리의 혼란스럽고 창피하고 당황스러운 부분을 우리의 연인이 다른 누구보다, 어쩌면 우리 자신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P 35
사랑의 초기 단계에는 남에게 내보이면 절대 안 될 것 같았던 많은 비밀을 마침내 드러낼 수 있다는 순전한 안도감이 어느 정도 생긴다. 우리는 우리가 존경할 만하거나 정신이 온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으며, '정상'이거나 사회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유치하고, 공상적이고, 거칠고, 희망에 들뜨고, 냉소적이고, 허약하고, 다중적이어도 괜찮다. 우리의 연인은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눈감아준다. P 37
약혼한 연인들에게 참을성 있게 자아를 살펴보면서 정확히 무엇 때문에 청혼을 하거나 받아들였는지를 조금 더 깊이 설명하라고 요구하면, 사람들은 이를 비낭만적이고 심지어 야비하다고 여긴다. 이렇듯 혼인 과정을 엄정히 분석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 지위가 낮다. 물론 우리의 질문은 주로, 어디서 어떻게 청혼 했느냐에만 집중된다. P 55
결혼에 대한 그의 확신을 떠받치는 진지한 생각은 사실상 전무하다. 그는 결혼 제도에 관한 어떤 책도 읽은 적이 없고, 지난 10년 동안 아기와 10분 이상 있어본 적도 없다. P 56
현대는 합리성, 그 불행의 촉매이자 회계적 요구에 물린 듯하다. 더 나아가 결혼이 경솔해 보일수록(예를 들어 만난 지 6주 만에 어느 한 쪽이 직업이 없을 때, 또는 둘 다 10대를 갓 넘겼을 때), 사실은 더 안전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P 57
결혼이 실용적인 면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은 오히려 결혼에 더욱 감정적인 설득력을 부여한다. P 58
그가 청혼한 것은 그와 커스틴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을 보존하고 '동결'시키길 원해서다. 그는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해 황홀한 기분이 영원해지길 기대한다. P 58
청혼은 어떤 면에서 그가 달려가는 미래와 관련이 있지만, 그 못지않게 그가 벗어나려는 과거와도 관련이 있다. P 59
다소 부끄럽지만 결혼의 매력은 혼자 산다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로 귀결된다. P 60
어떤 관계든 그 성공은 연인과 함께할 때 얼마나 행복한가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혼자인 것을 각자가 얼마나 걱정하는가에 따라서도 결정된다. P 61
독신 생활에는 자신이 얼마나 정상적인지에 관해 그릇된 자아상을 지어내는 습성이 있다. P 61
그는 그녀의 상처 입은 면을 아주 빤하고 감상적인 방향으로 해석한다. 자신이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P 63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 맛본 사랑이란 보다 파괴적인 다른 역학들과도 얽혀있다. 예를 들어, 통제 불능의 어른을 도와주고 싶은 느낌, 아빠나 엄마가 다정하지 않다거나 그들의 분노가 두렵다는 느낌 또는 철없는 소원을 자유롭게 표현할 만큼 집안 분위기가 안정적이지 않다는 느낌과도 뒤얽혀 있는 것이다. P 63,64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P 65
낭만적 모험은 이제 지나갔다. 지금부터의 삶은 안정적이고 반복되는 리듬을 탈 테고, 한 해 한 해가 외형상 너무 비슷하여 그들은 종종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P 71
식기 세척기에 그릇을 어떻게 포개 넣어야 하는지나, 버터를 사용한 뒤 몇 분 안에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 엄격한 규칙을 고수하는 사람은 무안을 당하기 십상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등이 대단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 고민에 하찮고 별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 P 77
이렇게 각자 욕구의 맥락을 살피고 서로가 상대방의 믿음에 깔린 원인을 이해했다면 새로운 융통성이 뒤따랐을지 모른다. P 79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P 86
토라진 연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호의는 그들의 불만을 아기의 떼쓰기로 봐주는 것이다. P 89
진실한 사랑은 단혼제에 있고 욕망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믿는 것 역시 여전히 확고부동한 '정상'이다. P 99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않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P 100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분명하다. P 101
심리학 용어로 말하자면, 과민 반응을 하는 사람은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누군가 ㅡ 전혀 당해 마땅하지 않은 사람 ㅡ에게 '전이' 시키는 것이다. P 110
감정을 그 출발점으로 송환하는 일은 사랑의 가장 섬세하고도 필요한 과제다. 전이의 위험성을 인정하면 짜증과 비난보다 공감과 이해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P 114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P 116
커스틴은 남편의 전화기를 지키는 일에 서명 한 적이 없고 다 자란 이 영장류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P 122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 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중략) 우리는 정말로 책임이 있는 권력자에게 소리를 내지를 수가 없기에 우리가 비난을 해도 가장 너그럽게 보아주리라 확신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 (중략) 우리가 마구 소리를 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 머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에게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다. P 123
밑도 끝도 없이 무분멸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뿐이다. P 124
커스틴이 상세한 설명을 원하는 건 불안에 대처하는 그녀의 방식 때문이다. 그녀는 사실들을 움켜쥐고 정리한다. P 126
부모의 기적 같은 능력을 보고 감탄했던 어린 아이가 수십 년 뒤 어른이 되어 그때의 경외감에 별난 경의를 표하듯 상대방의 능력을 과대평가 하는 것이다. P 127
갓 시작한 관계 안에서 우리의 취약성은 관대하게 다뤄진다. P 131
결혼은 라비와 커스틴에게 서로의 성격을 각별히 자세하게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P 132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두 프로젝트 ㅡ 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ㅡ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P 138
가끔 친구들의 상대적인 부를 바라보며 걱정할 때 커스틴은 그녀의 장점에 내재한 약점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는 걸 이제 라비도 알게 된다. P 140
부부는 힘을 합쳐 예산을 편성하고 예상 교통량을 계산하고 집의 평면 계획을 짜는 반면에, 배 속의 태아는 오직 혼자서 두개고로가 거의 1세기 동안 단 한 번도 쉬지 않을 펌프를 만들 줄 안다. P 144
아이들은 결국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이 되어 - 그들의 철저한 의존성, 자기중심주의, 연약함을 통해 -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 이 사랑은 상호 호혜를 강렬히 원하지도 성급하게 후회하지도 않고, 타인을 위해 자아를 초월하는 것만을 진정한 목표로 한다. P 146
아기보다는 일반 가전제품이 더 상세한 취급 설명서와 함께 온다. 인간 사회에는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인생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해줄 게 결국 그리 많지 않다는 측은한 믿음이 존속한다. P 147
더 자란 아이들이 가끔 큰 불안을 느끼며 판단을 내리듯이, 아이들은 아무 '요점'이 없고, 이것이 아이들의 요점이다. P 147
자율과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 -문자 그대로 - 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 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P 147
아기의 순전한 무능력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P 148
커스틴도 라비도 사랑과 지루함이 그렇게 뒤섞인 경우를 본 적이 없다. P 148
에스터의 유아기라는 긴 밤 끝에 하나의 독립된 의식체로서 깨어날 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완전히 잊히겠지만, 세상이 기본적으로 편안하고 신뢰할만한 곳이라는 느낌은 불멸의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유아기의 핵심 사항들은 개별 사건으로가 아니라 감각기억으로 저장된다. P 149
부모는 울음, 발길질, 슬픔, 화가 진정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해야 한다. 이 해석 활동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평범한 성인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해석 양상과 확연히 차별되는 점은 자애심이다. 부모는 아이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중략) 아이가 울 때 우리는 아이가 심술궂거나 자기 연민에 빠졌다고 비난하지 않고, 무엇이 불편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한다.
만일 이 본능을 성인들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입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친절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성인들의 관계에서도 심술궂음과 잔인함을 보아 넘기고 거의 항상 그 이면에 깔려있는 두려움, 혼란, 피로를 감지해낼 수 있다. 인류를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P 150
부모로서 우리는 사랑에 관해 또 다른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의지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달려 있는 그 존재 주변으로 어떠한 책임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할지를 깨닫는 것이다. (중략) 야만인이 크리스털 잔을 쥘 때에는 반드시 가볍게 쥐려고 해야지, 자칫하면 그 우람한 손에 잔이 마른 낙엽처럼 부서질 수 있다. P 151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P 155
성인이 되어 맨 처음 관계를 형성할 때 유년기에 우리가 경험했던 자애롭고 이타적인 사랑을 찾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친다 해도 놀랍지 않다. P 156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을 대할 때 우리는 성숙함에 도달하는 길에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는지를 떠올린다. 사랑스러움은 우리 자신의 중요한 한 축이되, 추방당한 한 축이다. P 159
성인의 영역에 들어가는 열쇠를 얻기 위해 너무 엄격하고 확실하게 포기해야 했던 자질들 말이다. P 159
부부는 아이가 다시 잠드는 것을 지켜본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도비가 옆에서 함께 이불을 덮고 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잠들지 않은 채 가슴 아려 한다. 그들의 어린 딸이 성장하면 그들 곁을 떠나 고통을 겪고 거부당하고 비탄에 잠기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간 그녀는 위로를 갈망할 테지만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고에 있을 것이다. 언젠가 진짜 용들이 나타나면 엄마 아빠는 그놈들을 처치할 수가 없다. P 162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린애 같은 면에 조금 더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면 더욱 멋질 것이다. P 163
한두 명의 어른에게 끝없이, 터무니없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누려본 적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빽빽하게 얽힌 삶의 문제를 풀어나갈 만큼 강해지길 바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다. P 164
사람은 누군가의 곁에서 안전한 느낌을 받을 때에야 이 정도로 괴팍해질 수 있다. P 166
사랑을 드러나지 않게 실행한 결과로, 좋은 부모는 그 실행이 잘된 경우에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의 표적이 되고 만다. P 168
부모가 아무리 겸손하게 부인하고 남들 앞에서 자신의 야망을 아무리 낮춰 말해도 아이가 생기면 ㅡ 적어도 처음에는 ㅡ 완벽함을 맹렬히 추구한다. 그저 또 하나의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완벽함의 특별한 표본을 창조하려 하는 것이다. 평범함은 통계상 정상임에도 결코 최초의 목표가 되지 못한다. 그 결과 아이를 어른으로 키우는 데 너무 막대한 희생을 치른다. P 172
그는 부지중에 에스터의 마음속에 여자에게 이상적으로 행동하는 남자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지만 물론 그 이상은 라비라는 남자를 조금도 진실하게 반영하지 않는다. P 174
또한 그는 아이들의 짜증에는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도 안다. 아이들이 언젠가는 집을 떠나리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P 175
인류의 생존은 마침내 넌더리를 내고 사랑과 흥분을 선사할 더 만족스러운 원천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은 채 세상으로 나아갈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 P 176
칙령은 사춘기의 짜증과 분노라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실현된다. (중략) 에스터와 윌리엄이 이 집을 떠날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려면 라비와 커스틴이 우스꽝스럽고 구식이고 따분하다고 느끼기 시작해야만 한다. P 176
자연은 아이들이 집에서 달아날 정도로 성장한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선조들의 온갖 결점에 예민해지게 만드니 이 점에 관해서는 아이들에게 친절한 셈이다. P 177
모든 막간에는 상대가 여전히 나를 원하는가라는 의문을 매번 새롭게 되살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P 181
불안은 별 탈 없음을 뜻하는 별난 징후일 수도 있다. P 181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P 189
현대사회는 부부가 모든 면에서 평등하기를 기대한다지만,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고통의 평등이다. (중략) 자신이 더 힘들게 살고 있다는 자기 위안식의 결론을 피하려면 초인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P 194
중년의 유혹자가 솔직한 것은 자신감이나 오만함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처량한 인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조급한 절망감 때문이다. P 204
불안정한 남자들이 애처롭게도 자신의 매력을 의심하고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어떤 위험한 짓을 벌이는가. P 205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에 불륜에 뛰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파트너를 배신하는 수고를 감내하려면 대개 파트너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P 207
그들은 결코 분개할 필요가 없으며, 계속해서 서로를 좋은 마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만이 그럴 수 있듯이. P 209
세 번째 전제: 일부일처제에 충실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그의 번영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다. P 215
이게 결혼 생활이고, 우리 두 사람이 평생 동안 유지하겠다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서명한 삶이야. 난 할 수 있는 한 거기에 충실할 작정이야. P 227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P 229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 뿐이다. 사람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P 236
그는 결국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불행하게 할지 알 정도로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 P 237
결혼: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P 237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 주의자가 될 순 없다. P 238
그 누구와, 심지어 천생의 배필과 결혼을 해도 자신을 기꺼이 희생시켜 얻은 다양한 고통을 확인하게 된다. P 239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 욕구, 열정, 갈망 등)에 대한 축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 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식한다. P 242
사랑의 여정에서 도움을 주려고 적재적소에 서 있는 많은 것들이 그렇듯이 상담도 심각할 정도로 낭만과 거리가 멀어보인다. P 248
불안정 애착의 징후는 침묵, 지연, 막연함 같은 애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P 253
그녀는 양쪽의 감정을 가려낸 다음 서로 상대방의 감정을 경청하게끔 해주고자 한다. P 254
라비의 짜증으로부터 커스틴을 보호하고 커스틴의 냉담함으로부터 라비를 보호하는 페어베언 여사의 안전망 속에서 두 사람은 각자 상대방의 잔인한 겉모습을 들추고 그 안에서 겁에 질린 가여운 아이를 보게 된다. P 256
회피 애착 유형은 정서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노출을 줄이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 특징이 있다. (중략) 회피적인 사람은 사랑을 주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게 되었을 뿐 마음 속으로는 상대방을 깊이 염려한다. P 258
그들은 어렸을 때 부당한 실망을 극복해야 했고 그 결과 감정의 노출이 어색하기만 한 대단히 방어적인 성인이 되었다. P 259
그녀는 라비와 커스틴도 이제 친숙해진 진리, 그러나 그들도 알고 있듯이 주변을 둘러싼 소음에 애석하게도 잃기 쉬운 진리의 옹호자이다. 사랑은 단순한 열정을 넘어 기술이라는 것 말이다. P 262
우리가 스스로에게 전해야 하는 중요한 통찰은 대개 밤이 되어야 찾아온다. P 264
그러나 이 충동 때문에 개인의 평정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인류 역사에서 몇몇 천재가 위대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범인들이 매일 불안과 강박에 시달린 덕분이었다. P 267
이제 '충분히 좋은 게' 충분히 좋다. P 267
라비는 적어도 그런 퇴행 상태에는 즉각적인 검열에 저항해야 하는 중요한 면이 있음을 알 만큼은 성숙했다. P 268
불안은 그의 중심에, 겁에 질린 부적응자라는 그의 가장 근본적인 기질 속에 내재한다. P 269
그는 강하고 능력 있는 아내가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람 곁에 있기에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P 269
이 세상에 항상 나쁘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드문 순간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사랑해주는 것뿐이다. P 270
노화는 피곤해 보이는 것과 좀 비슷하지만, 잠을 아무리 자도 회복되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할 것이다. P 274
결혼한 지는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좀 늦게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P 277
이제 라비는 낭만주의 개념들이 재난을 낳는다는 것을 안다. 그의 준비된 마음은 완전히 다른 기준들에 기초한 결과다. 그가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P 278
어떤 사람이 우리를 상당히 실망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알기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P 278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단일하고 분화되지 않은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함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P 281
중요한 여러 분야에서 파트너가 우리보다 더 현명하고 합리적인고 성숙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이다. P 283
가정생활의 너저분함을 잘 아는 지금, 그들은 공들여 꾸민 환대를 조금 즐길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P 287
지금까지 사내아이를 키워왔으니, 남자들이 여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입장에 서기 전에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는지를 알고 있다. 남성의 고약함이 대개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P 289
결혼 생활에 머무른 것은 기이하고도 신기한 업적이며 두 사람은 그들만의 전투로 달련된 상흔 입은 사랑에 충성심을 느낀다. P 290
그들은 감사와 화해의 교훈을 일상생활이 있는 더 춥고 더 검소한 집으로 가져갈 것이다. P 290
조국에 봉사하거나 적과 싸우라고 부름을 받을 리는 없지만,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P 293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P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