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인연

'악한' 인연을 '단지 '나쁜' 인연으로 받아들이는 법

by 한솔

좋은 인연도 기대다보면 서운한 인연이 될 때도,
나쁜 인연도 기다려보면 밉지만은 인연이 될 때도 있다.


나쁜 인연의 중심에는 말에 대한 이해와 오해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한 사람의 말보다, 그 말을 둘러싼 그 사람의 다른 모든 것에 더 많은 의미가 스며들어 있을 때가 있다. 상대방의 말을 둘러싼 숨소리, 말의 리듬, 표정, 몸짓과 팔짓들. 뾰족하고 날카로운 말에 정신이 팔리다 보면 그러한 것들을 보기 힘들다.


류노스케 스님이란 분은 이럴 때 다른 사람의 말에 따옴표(' ')를 스스로 붙여서 받아들여보는 연습을 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말에 따옴표를 붙여서 받아들이다보면, 그것은 하나의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그 말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 수많은 진실들 중 하나의 진실이 된다. "한솔 이 x새끼야"라는 말에 다른 진실들이 파묻히는게 아니라, '내 앞에 있는 A가 나에게 '한솔 이 x새끼야'라고 한다. 그는 숨이 아주 거칠고 말이 빠르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때 거친 숨과 빠름 말의 리듬은 불안함에서 오는 불쌍한 말일 수도 있고, 서운함과 답답함이 쌓인 울분에서 오는 아픈 말일 수도 있다. 이렇게 나를 향해 날라오는 말의 화살로부터 살짝 비켜서 보면 더 많은 풍경들이 보인다.


결국은 초연함이다.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하는 말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거꾸로 뒤집어 보면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귓속의 귀로 목소리 속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초연함으로 끊임없이 걸러내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초연함이란 하나의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 어떤 고요한 바다도 스스로 파도치지 않았던 적은 없듯이, 나에게 초연함이란 내면 속에서 끊임없이 무심함과 열정이라는 양극단이 부딛히며, 그때 분출되는 격렬한 파도가 스스로를 쓸어내릴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과정일 뿐이다.


예수는 자신에게 나빴던 이들을 기도하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성인군자도 아니고, 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저들이 자기들이 하고 있는 말을 알지 못한다'라고 깨닳을 때, 혹은 나 자신도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알지 못할 때가 수없이 많을 거라는 사실을 깨닳을 때,


나쁜 인연은 적어도 악한 인연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2015년 9월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