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사한 2008년은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펀드가 반토막 났던 시기이다.
2006년, 2007년엔 아무 펀드나 가입해도 수익이 나는 시기였다.
고객들은 예적금을 해지하고 펀드로 갈아탔다.
2008년 예금 금리가 7프로 남짓이었는데, 그보다 더 높은 수익을 준다고 하니 줄서서 펀드를 가입했던 시기였다.
2008년에는 은행에 찾아오는 고객의 항의가 많았다. 은행직원이 추천해줘서 가입했다. 손해나는 건 줄 몰랐다. 왜 이런 상품을 추천했느냐 등등.
이유를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만 했다.
기다리면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도 펀드마다 천차만별이었는데 그때 당시 친디아, 브릭스, 리츠 등의 상품에 많이들 가입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수익율이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은행생활을 하면서 2008년 과 같은 일을 두번 정도 더 겪었다.
그때마다 대중 심리는 똑같다는 것을 느꼈고 돈을 벌려면 철저히 대중과 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은행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단순 입출금만 하면 되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많은 업무가 있었다. 예적금, 환전, 해외송금, 거기에 대출까지. 이거 평생 다녀도 모든 업무를 익힐 수 없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계속 사람을 상대해야만 했다. 고객들은 정말 다양했다. 학창시절의 나는 사람을 선택해서 만날 수 있었다면 취업 후의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을 골라서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험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에게 상처도 많이 받았다. 때론 수화기 넘어로 욕설을 들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벌렁거렸는지..
'그런 전화가 오면, 욕하시면 전화를 끊겠습니다.'라고 하고 전화를 끊어. 그런 전화를 받고 있으면 너만 상처를 받게 돼.
과장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들으며 사회생활 하는 법을 익혀 나갔다.
매번 카드 선결제를 하러 오시는 분도 계셨는데 새로 오는 직원에게는 텃새를 부리 듯 조금만 일을 버벅대도 큰 소리로 화를 내곤 했다. 신입직원이었던 나는 약간의 버벅댐이 있었다.
뭐 이딴 걸 여기 갖다 놨어? 라는 말투의 높은 언성으로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꽃길만 같았던 회사생활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몇달만에 알게 되었다. 퇴근 길에 울기도 많기 울었고, 내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에 의해 내 가치가 평가 받는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했다.
고객과의 관계 외에 챙겨야 할 것은 실적이었다. 은행은 사실 영업직이었다. 일을 잘하느냐의 기준은 얼마나 실적을 많이 내느냐에 달려있었다. 전국의 직원을 순위로 매겨 포상을 하던 게 그때 당시 실적을 내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당시 이 은행의 가장 큰 목표는 카드였는데, 옆에 일하던 대리님이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해외여행? ㅇㅇ아 카드 많이 만들면 해외여행 보내준대. 우리 같이 해보자'
고객 뿐만 아니라 지인, 친척 총 동원하여 카드 발급을 했다. 부탁도 하고, 권유도 하고. 몇달간 카드에 빠져 지냈다. 퇴근 길에 내 손에는 카드 신청서가 쥐어져 있었다.
매일 나오는 실적표는 나를 더 채찍질했다. 지금까지 한 게 아까워서라도 나는 꼭 목표를 달성해야겠다. 그리고 그 대리님과 나는 마침내 해외연수를 갈 수 있게 되었다.
일본으로 해외연수를 떠났는데 다들 쟁쟁한 분들이었다. 은행은 대기업이지만 사실은 중소기업과 같다. 거대한 조직안에 속해있지만 실상 한 점포당 적게는 10명 많게는 30명 이내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일 만나는 직원도 점포 안의 직원들 뿐이다. 대기업에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을 이 때 처음 해봤다.
그 후로도 제주도 연수 , 포상비 등 열심히 한만큼 대가가 주어졌다. 어쩌면 할만하네, 라는 생각을 가끔하기도 했고 아 더는 못다니겠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회사 생활 밖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새벽엔 영어학원을 다녔고, 자격증을 계속해서 땄다.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자격증들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취업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했다. 일-공부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1년이 흘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