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발령을 받은 곳은 집에서 1시간 좀 더 걸리는 거리였다.
버스 한번 타면 되는 거리에 다니다가
지하철을 두번 갈아타야 하는 거리의 회사는 출근부터 힘들었다.
다행인 것은 서울의 수많은 직장이 모여있는 곳이라
내점 고객부터가 적었기에 업무에 대한 부담은 줄었다.
새로 만난 직원들 역시 나와 나이대가 비슷했고
여자 차장님은 기분이 들끓어서 직원들 사이에서는 냄비라고 통했다.
좋은 분인데, 다혈질인 성격.
회사생활을 하면서 힘든 것은 외부 고객 뿐 아니라 내부 직원간에도 있다.
마음에 맞는 직원도 있지만 아닌 직원도 분명있기 마련이다.
은행의 장점이라고 하면
누구를 만나든 헤어짐이 있다는 것이다.
짧으면 6개월 , 길면 5년이라는 시간 안에
누군가는 발령이 난다.
그게 슬픈 일일수도,
기쁜 일일수도 있다.
나는 첫 점포를 떠나면서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지만
남은 직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모르겠다.
지점을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이 되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아이 둘 낳고 싶다는 바램만 있었다.
내 인생은 역시 이렇게 술술 풀리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8주가 넘어도 아기집 안에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 불안감에 시간을 보냈다.
의사선생님은 계류유산이라고 했다.
임신 초기에 자주 있는 일이라고 한다.
매일 산모를 만나며 다양한 일을 겪는 의사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무나 속상했고 너무나 많이 울었다.
수술을 마치고 일어났을 때
출산하고 몸을 회복하는 산모들 사이에서 외롭게 울었다.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다시 출근했고,
얼마 후 같은 지점의 언니가 임신을 했다.
그 당시의 나에게는 임신을 한 사람이 가장 부러웠다.
남들에겐 쉬운 일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라는 고민으로 시작해서,
그냥 둘이서 즐겁게 살자. 그거면 됐다. 그 마음으로 바뀌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그런 마음을 가지자마자 아이가 찾아왔고
나는 임신 10주에 바로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이번엔 이 아이를 꼭 지키겠다고.
육아휴직동안 내가 시작한 것은
산모교실에 다니는 것이었다.
여러 보험회사, 육아용품 회사들에서 주최한 산모교실을 다니면서 아기용품도 마련하고 그게 계기가 되어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게 지금 운영하는 블로그이다.
아이 용품 리뷰부터 시작해서 아이의 성장과정, 소소한 감정들을 기록하기 시작한 블로그. 현재는 재테크와 직장생활, 투자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2013년부터 시작했으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블로그 최적화가 되어야 체험단을 할 수 있다고 해서
키워드에 대해 공부했고 매일 글 쓰는 연습을 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재밌어서 하는 일이었기에
밤에 잠도 포기하면서 했다.
세상에 무엇이든 헛된 일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시간을 투여하면 어떤 일이든 잘하게 된다는 것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임신 출산 육아는 그야말로 내 인생을 다시 태어나게 해준 계기였다.
첫째의 걸음마 하는 모습을 보며
수천번 넘어져서 걷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렇게 작은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데
나 역시 그런 부모가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24개월의 육아휴직기간이었지만
너무 일찍 휴직을 들어온 탓에
아이가 돌 조금 지나자마자 복직을 해야했다.
퇴사를 해야겠다 다짐했다.
엄마는 일을 하고 계셨고,
시댁은 시골이었다.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퇴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퇴사를 가장 반대한 사람은 엄마였다.
여자도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신다.
본인 일을 그만두고 내 아이를 돌봐주신다고 하신다.
어린이집에 맡기는 대신
엄마에게 돌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참 죄송한 일이지만
말도 못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었다.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매일 차로 운전하며
첫째를 몇달간 돌봐주셨다.
아이가 아파서 밤새 응급실에서 시간을 보낸 뒤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던 날
그리고 복직을 하였다.
복직을 한 곳은 서초구에 있는 어느 점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