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둑
기차역 플랫폼 위, 정적이 흘렀다.
가까운 곳에서 기적(汽笛)이 울렸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흑백 사진 속, 번진 얼굴.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존재.
이제 그는 눈앞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그 목소리.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쥔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에서, 그와 함께 서 있던 자신.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 남자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이 순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 질문은 옳지 않아요.”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요?”
그 남자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정확한 질문은 이거겠죠.”
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당신은 누구였죠?”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질 듯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문장들.
책장 속에서 흩날리는 활자들.
낡은 종이 위에 새겨진 오래된 이야기들.
그녀는 손끝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 남자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당신은.”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이 이야기가 처음이 아니었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기억 저편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오래된 꿈처럼 희미했다.
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은, 소설 속에서 이미 한 번 있었던 일이니까요.”
순간, 기차가 철로 위를 지나갔다.
그녀는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이 흔들렸다.
이미 쓰인 이야기.
이미 존재했던 문장들.
그리고, 자신.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그럼 나는,”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그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그녀의 손에서 사진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서 그것을 펼쳐 보였다.
사진 속의 글자가 희미하게 번졌다.
마치 오래된 잉크가 물에 젖은 것처럼.
그리고.
그 문장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당신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 순간, 기차역의 불빛이 흔들렸다.
도시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다음 장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