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 둘째날, 맹그로브 숲에서
이튿날의 메인 일정은 봉가완 반딧불 투어였다. 대부분 여행객들이 마지막 날 일정으로 반딧불 투어를 진행하기 때문에 귀국 투어로도 불리는데, 대체로 출국 시간에 딱 맞게 일정이 끝나고 공항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같은 버스에 탄 사람들이 대부분 호텔이 아닌 공항에서 내려달라는 걸 보며 일정을 잘 못 짠 게 아닐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걱정은 버스를 타고 봉가완으로 향하는 동안 심화되었다. 하늘에 비구름이 조금씩 몰려왔기 때문이다. 동남아는 스콜이라고 하는 소나기 현상이 잦은데, 하필 우리가 투어를 떠나는 시간에 스콜이 시작된 것이다. 술렁이는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가이드분께서 부단히 노력하셨지만, 이미 시작된 불안감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희망을 주는 데 실패한 가이드분은 비가 와서 시원하게 투어를 진행할 수 있다는 억지 긍정을 보이고는 민망한 침묵을 지켰다.
결국 시원한 비를 맞으며 보트는 출발했다. 원숭이를 좋아하는 터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원숭이와 악어는 비에 모습을 감추었다. 세계 3대 석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석양조차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맹그로브 숲의 멋진 장관이 심심한 위로를 건넸으나, 유튜브 영상으로 높아진 우리의 눈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남은 희망은 반딧불이뿐,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를 저버리지 못한 채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의 끝에 해가 떨어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 ‘원빈’이 등장했다. 그는 반딧불이를 유인하는 현지 직원이었는데, 현지에서도 반딧불이를 잘 유인하기로 소문이 난 직원이라고 한다. 듬직한 등판과 초록색 손전등을 흔드는 유려한 손목 스냅에 우리의 기대감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내 반짝이는 우리 눈동자와 반짝이는 반딧불이의 빛이 맹그로브 숲을 수놓았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말레이시아어로 ‘오라’는 의미의 ‘마리마리’를 외쳤고, 빛은 우리를 향해 천천히 모여들었다.
아름다웠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가까이서 보는 것 같았다. 반딧불이의 빛은 열이 나지 않아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고 한다. 덕분에 유튜브에서도 보지 못한 장관이 펼쳐졌고, 보트에 탄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동심으로 돌아가 두 손에 그 빛을 담고자 했다. 그때 가이드분의 안내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맹그로브 숲의 반딧불이는 하루살이처럼 입이 없어요. 그래서 수명이 매우 짧고 예민하니 조심히 다뤄주세요.”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운명이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운명인가. 수명이 짧은 만큼 이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를까, 아니면 오히려 더 빠르게 지나갈까. 그 소중한 시간을 여행객들에게 나누어주었던 맹그로브 숲의 반딧불이는 순간순간을 무슨 생각으로 살아갔을까. 어쩌면 짧은 수명이 한스러워 오래 기억되고 싶었던 마음이 아름다운 빛으로 발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들의 소중한 하루를 감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꺼이 내어준 귀한 시간을 평생 추억으로 간직하는 일이 그들을 위한 유일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타키나발루의 둘째 날을 밝혀준 반딧불이에 감사를 전하며, 우리의 둘째 날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