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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세시 Oct 29. 2020

즉석밥이라 죄송합니다.

간혹 즉석밥을 사서 먹는 일이 있다.

여행을 가면 전자레인지에 간편하게 데워 먹을 수 있어 아주 좋다.

밥이 부족할 경우, 급히 편의점에서 사 와 몇 분 안에 해결할 수도 있다.


IMF를 맞은 즈음 처음 즉석밥을 보았을 때는 '와, 세상 좋아졌다.' 이젠 곧 밥솥도 쓸 일이 없어지겠구나 했다.

호기심에 처음 즉석밥을 사서 먹어봤을 때는 '생각보다 괜찮네?'였다. 집에서 한 밥만큼 맛있진 않지만 대용으로 먹기 충분한 식감과 맛이었다.


그제, 반찬은 있는데 밥을 하기 너무 싫어서 즉석밥을 준비했다.

즉석밥을 아이에게 먹이려니 뭔가 모를 미안함이 들었다.


밥하기 너무 싫은데, 오늘은 그냥 이렇게 먹자.


배우자는 즉석밥이면 어떻냐며 내가 덜 힘든 방향으로 하자고 한다. 정말 간편하다.

두 개를 한꺼번에 넣고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3~4분 동안 반찬을 꺼내면 모든 식사 준비가 끝난다.

즉석밥의 밥맛은 어찌나 좋아졌는지, 물대중을 못 맞춰 어느 날은 질고 어느 날은 된, 내가 한 밥에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그 맛이 일품이었다.

배우자에게 도시락을 싸주던 때부터 즉석밥 구매량은 크게 늘었다.

남편은 밥까지 싸가려니 가방에 들어가지 않아 따로 들어야 하는 게 부담스럽다며, 즉석밥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그 뒤로 약 한 달에 한번 즉석밥을 샀다.

즉석밥을 사는 과정에서 같은 물건을 좀 더 싸게 구매하기 위해 검색하다 한 부분에 매우 놀랐다.

내가 놀란 것은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밥을 하지 않고 즉석밥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현상인데 당연하게 여기지 못했던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을까?


오륙 년 전 친구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친구가 일회용 용기에 반찬들을 꺼내고, 봉투에 담긴 국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저녁상을 내는 모습을 보았다.


반찬 네 개에 국 하나 이렇게 해서 만원이야, 괜찮지?


나는 친구의 행동을 놀랍게 바라보며 얼떨결에 '괜찮네'하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세상에 아이에게 반찬하고 국을 사 먹이다니.'

'별다른 일도 없이 가사랑 육아만 하는데 이걸 사 먹다니.'

'이걸 해 먹으면 양이 몇 배인데, 돈 아깝다.'


지금은 나도 집에서 먹는 반찬의 절반이 가공식품이거나 반찬가게에서 사 온 반찬이다.

하지만 자취를 하면서도 반찬을 사 먹는 일이 없던 당시의 내겐 꽤 충격이었던 것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집 주변에 반찬가게가 널렸는데도, '이런데가 장사가 되나? 혹시 자취생들이 사 먹나?' 하는 의문만 갖고 스쳐 지나갔을 뿐 기웃거린 적이 없었다.

누군가 내가 사는 동네에 와서 '여긴 반찬가게가 정말 많다, 좋겠다.'라고 했을 때도 뭐가 좋다는지를 몰랐다.

7년을 넘게 거주한 곳의 반찬가게 여럿이 사라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을 때, '금방 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가네'라고 생각했다.


친구의 일을 겪고 보니, 왜 반찬가게들이 망하지 않고 오래가는지, 한동네에 여러 곳이 있어도 다 유지가 되는지 약간은 이해가 됐다.


'아~ 게으른 주부들 때문이구나.'


그런데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생활을 해보니, 이건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제야 친구가 보여줬던 그 모습을 속으로 욕했던 것도 부끄럽고 미안했다.

처음으로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사 먹게 된 것은 아이가 돌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이유식까지는 어찌 해먹였는데, 아이가 유아식에 들어가며 벽에 부딪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반찬도 한정적이었고, 그나마도 아이가 잘 먹도록 만들지 못했다.

SNS를 타고 올라오는 '아이주도 식사' 인증글들의 식판은 특히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저렇게 화려하고 멋지고 먹음직스러운 식판을 만들어 줄 능력이 없었다.

더욱이 반찬을 만들면서도 아이 것 따로, 어른 것 따로 만드는 것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 또래의 엄마와 이야기 중 이런 어려움을 토로했다.


반찬을 언제 만들어요. 저는 아이반찬 파는데서 사다 먹여요. 더 잘 먹고, 다양하고.


나는 그 엄마에게서 반찬가게 정보를 얻어 주문을 했다.

배우자에겐 조심스레, 이만저만해서 반찬을 사봤다고 했다. 그는 사 먹으면 어떻냐며 내가 좀 더 편한 방법으로 하라고 했다. 처음 반찬을 낼 때 아이에게 제법 미안함을 가졌다.

그렇게 반찬 사 먹기를 20개월, 지금은 미안함이 어딨는가? 오히려 반찬가게에서 들여온 찬통을 당당히 꺼내 배우자에게 보이며 설명까지 한다. 요새는 시대가 참 좋다며, 한 달 식단이 미리 짜져 있고, 일별로 주문만 하면 새벽에 국 하고 반찬이 문 앞으로 다 배달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제는 반찬을 사 먹는 일이 당연해졌다. 반찬 할 시간에 여가를 좀 더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최근 집밥 차림, 사온 반찬 한가지가 함께 있다.

반찬도 사 먹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는데, 가정에서 밥을 하지 않고 즉석밥을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배우자에게 즉석밥을 도시락으로 제공하면서 늘 찝찝함을 버리지 못했다. 플라스틱 용기째 데워먹는 거며, 저 안에 표기되지 않은 무슨 성분은 없을지 좀 찝찝하다고 하자, 남편이 말했다.


컵라면 한 번이면 끝이야. 도시락 싸줘서 음식 덜 사 먹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더 건강해질 거야.


아, 그렇구나. 이미 우리는 생활 속에서 각종 첨가물이 들은 가공식품과 폴리프로필렌으로 포장된 음식을 제법 많이 먹고 있다. 음식이 아니더라도, 사무실에서 간혹 쓰는 종이컵 내부에도 코팅 물질이 발라져있지 않던가.


벌써 또 즉석밥을 살 때가 되었다.

즉석밥이 몇 개 남았는지 물어보고, 또 구매해야겠다는 말을 하자 배우자는 내게 입단속을 시켰다.

어머니에게 점심에 즉석밥을 먹었다고 하자, 왜 밥을 싸가지 않고 즉석밥을 먹느냐며 심기 불편한 음색을 보이셨다고 한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아차 싶어, 배가 고파서 밥이 부족할 때 즉석밥을 사서 더 먹는 거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즉석밥이라 죄송합니다.


모든 것을 만들어 차리던 세대인 분들, 어머니뿐 아니라 나의 친정엄마도 즉석밥을 먹는 것을 이해 못하실 것이다. 친정엄마는 반찬 사 먹는 것도 이해불가라 하신 분이기에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시대는 더욱 간편하면서도 풍성하고, 가성비 있는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뒤늦게 내가 반찬을 사 먹게 되었듯, 언젠가는 밥도 대부분 사 먹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즉석밥을 알게 된 지 벌써 25년쯤 되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밥솥 없는 가정이 드문드문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압력밥솥, 전기밥솥, 무쇠솥을 쓰고 있다.

'쌀'문화가 오랜 세월을 지배해 온 민족이기에 주식으로서의 위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겠지만, '밥'을 짓는 장소는 점차 변하고 있다.

나의 세대까지는 어느 정도 밥을 해 먹겠지만, 어쩌면 우리 아이의 자녀 세대들은 '밥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플라스틱에 대한 심기 불편함이 있다.


반찬을 사 올 때,

음식을 배달할 때,

어디서든 음료를 살 때,

장을 보러 가서 식품을 사올 때 등


너무 많은 플라스틱이 버려질때마다 죄책감을 더해서 분리수거 한다.

특히 용기에  색상이 들있거나  벗겨지지 않는 인쇄물이 붙어 있다면 분리수거 하며 화가난다.

가급적이면 배달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가급적 투명한 용기만 선택하려고 고집하지만 '편의성'을 생각하면 모든 부분을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단순하게'살고 싶은데, 이런 '복잡한 재활용'은 너무도 불편하다.

선택을 할 때 많은 고민을 하게 하고, 분리배출에도 많은 소모를 준다.

이런걸 생각하면 대부분 '만들어'먹는게 답이다.

하지만 만들어 먹자니 많은 시간과 노동이 필요하다.


단순한 참 좋은데 단순하게 살기 매우 어려운 시대다.




"그런데 집에선 잡곡이랑 콩을 섞어서 먹는데, 즉석밥은 현미 아니면 백미 밥이잖아~"

라며 즉석밥을 사지 않기 위한 주장을 하자, 배우자는 잡곡밥이 나왔다고 검색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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