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의 따뜻함에 손을 내민 디지털
전자책 독서는 하나의 취향이다.
내가 전자책을 사용하는 이유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독서가들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종이책을 읽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전자책을 읽는 사람은 발견하기란 꽤 어렵다. 혹여나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다. 그들과 나는 전자책이라는 은밀한 취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이책만 읽는 사람들이 종종 섣부른 오해를 하곤 하는데 전자책 독서가들이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자책 독서가들은 오히려 일반 독서가들보다 더 종이를 사랑하고 더 많은 책을 읽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환경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주저 없이 종이책을 들었을 사람들이다. 단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전자책을 통해 부족한 독서 환경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공간 : 책을 좋아하지만 더 이상 집에 종이책을 들여놓을 수 없는 사람들
-구매량 : 책을 더 많이 사고 많이 읽고 싶은데 점점 오르는 도서 가격이 부담스러운 사람들
-모바일 :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읽고 싶은데 장소나 환경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
-보존 : 2~3년만 지나도 그때산 책들이 어디로 갔는지 왜 사라졌는지 언제 중고로 팔았는지 아득한 사람들
내 취향을 대변할 수 있는 섹시한 디바이스가 필요하다.
전자책 리더기는 오직 하나의 목적에만 충실해야 한다. 그 목적은 바로 "독서"다.
얼마 전에 리디북스에서 전자책 리더기 페이퍼 프로가 출시되었다. 7.8인치의 시원시원한 화면을 채용한 페이퍼 프로는 20만 원 중반대의 가격을 형성한다. 저렴한 태블릿 디바이스와 가격이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몇몇 사람들이 저 가격에 전자책 리더기를 사느니 돈을 보태 중국산 저가 태블릿 PC를 사겠다는 의견을 보이곤 하는데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태블릿은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고 더 다양한 곳에 활용할 수 있는데 전자책 리더기는 컬러 화면도 아니고 반응속도도 느리고 오직 "독서"밖에 할 수 없다. 쉽게 말해 가성 비적인 마인드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과 스펙이다. 그렇다면 왜 전자책 독자들은 비싼 돈을 투자하여 전용 리더기를 사는 걸까? 전자책 리더기는 이미 몇만 명의 독서 인구가 사용하고 있고 이번 리디북스의 페이퍼 프로 또한 많은 전자책 독서가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합리적이지 않은 사람들인가?
이들은 왜 굳이 책 밖에 못 읽는 전자책 리더기를 사용하는 걸까?
전자책 전용 리더기를 사용하는 것은 첫째로 디지털 독서의 아날로그적인 경험을 극대화시키는 예의다. 흑백의 e-link는 종이책의 흑백 글자를 섬세하게 살려준다. 앞전에 언급했듯이 전자책 독서가들은 누구 못지않게 종이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종이의 감성을 대신 표현해주는 e-link는 모든 기능을 버려도 될 만큼 핵심 기술이다. 둘째로 아날로그의 느낌을 취하면서 디지털의 편리함을 채용한다. 독서 노트, 북마크, 검색 등의 편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책의 보관 및 관리도 편리하다. 셋째로 독서밖에 하지 못하는 기기라서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 기기가 다른 기능을 통해 노래도 듣고 영화도 볼 수 있었다면 분명 외면당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대체 가능해지는 순간 애정은 식기 마련이다.
취향, 조금은 불편하고 고집스러운 미학
진정 독서가 취향인 사람에게는 책 읽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여정이다. 책을 읽는 도중 책이 갑자기 꺼져서도 안되고 카카오톡 메시지나 페이스북 알림 같은 게 독서를 방해해서는 안된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은 섹시하지 않다. 이들은 단지 피치 못할 상황을 잠시 대리해주는 역할밖에 해주지 않으므로 사랑을 받을 수없다. 독서라는 취향을 메인으로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불편하고 대체 불가능한 고집이 고급스러움을 만들어낸다.
나는 집을 벗어난 장소에서 글쓰기가 취미라 노트북 들고 다닌다. 때로는 노트북의 무게가 부담스러워 더 휴대성이 좋은 태블릿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구매한 적이 있는데 결국은 다시 노트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노트북 하나 올려두기 힘든 상황에서 글을 써야 한다면 유용했겠지만 그럴 일이 별로 없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글을 쓰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라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또 이보다 작고 제한적인 기능을 가진 대체 기기들은 글 쓰는 맛을 떨어트리고 속도감 있는 작업을 진행하기 어렵다.
과거의 스마트폰은 매우 작은 사이즈였는데 멀티미디어 소비 시장이 커지자 패블릿이라고 불리는 큰 화면의 스마트폰이 앞다투어 출시되었다. 패블릿이라는 흥미로운 소비패턴은 동남아 시장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 이유는 비교적 소비력이 여유롭지 않은 개발도상국일수록 가성비 중심으로 소비사회가 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기기로 여러 서비스를 즐길 수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하나의 취미를 위해 고가의 장비를 마련하기 어렵지만 문화적 수평 관계에 놓이고 싶은 욕망이 큰 화면의 스마트폰을 성장시킨 것이다.
우리가 전용기기를 쓰는 이유는 내 취향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다. 스마트폰이 카메라를 대체하고 LP를 대체하고 TV를 대체할 수 있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기기로 더 최적화된 경험을 결국 선호하기 마련이다.
페이퍼 프로를 선택한 이유
기존의 6인치 기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이퍼 프로를 들인 이유는 7.8인치라는 압도적인 피지컬 때문이다. 가성비를 생각했다면 이미 6인치 기기도 사지 않았겠지만 내게는 전자책 독서 경험을 극대화해줄 수 있는 기기에 대한 욕구가 더 컸다. 음향기기는 본래의 생생한 음질을 출력하는데 품질이 구분되고 카메라는 높은 화소와 표현력에 따라 품질이 구분된다면 전자책 리더기는 종이책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쨍한 화면 구현력과 최적화된 소프트웨어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페이퍼 프로의 화면은 어지간한 종이책의 판형을 그대로 옮겨 올 수 있는 크기에 페이지수 또한 큰 차이가 없어 독서 시야가 광활해진다. 또한 리디북스는 전자책 전문 서점답게 가장 편리한 전자책 독서 습관에 어울리는 안정적인 소프트웨어를 구현했다. 이는 전자책 전문 기기라는 신뢰를 형성한다.
페이퍼 프로 가독성을 품다
페이퍼 프로는 7.8인치 화면으로서 종이책의 판형을 거의 그대로 화면에 옮겨준다. 익숙한 크기의 여백과 폰트가 눈에 들어오자 더 편안한 독서가 가능해졌다. 사실 작은 화면은 담고 있는 글자 수가 적어 조금 읽다 보면 넘김 버튼을 계속 눌러야 하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화면 자동 잠김 시간을 늘려야 할 정도로 한 페이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만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툭툭 끈기는 현상이 짧아져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페이퍼 프로 : 가로 147.3mm x 세로 199.8mm x 두께 7.69mm
종이책 <마션> : 가로 146 x 세로 209mm x 두께 35mm
<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 : 가로 115 x 세로 185 x 두께 20mm
여담이지만 페이지 수는 독서 모임을 할 때 은근히 중요하다. 보통 특정 구절에 대한 의견을 종이책 페이지 넘버를 기준으로 참고하는데 전자책은 일일이 단어를 검색해서 찾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화면이 커지면 화면의 응시가 길어지고 주변 단어들이 맥락으로서 다가온다. 하지만 작은 화면에서는 텍스트가 파편화되어 대충 훑어보는 수준으로 넘어가 경우가 많다. 디지털 기기로 보면 종이보다 기억의 휘발성이 크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여러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텍스트 중심부를 응시하는 시간과 연관되어 있다. 영화나 음악은 우리가 보든 보지 않던 흘러가기 마련인데 텍스트는 읽지 않고 흘려보내기가 어려운 콘텐츠다. 전체적인 맥락을 받아들이는데 적정한 시간 동안 텍스트가 노출되어야 하는데 페이퍼 프로의 화면은 충분한 시간 동안 응시해도 좋을 만큼의 텍스트를 담고 있다. (폰트 크기 조절은 물론 가능하다.)
아래의 사진들은 프론트라이트를 끄고 기본 값에서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페이퍼 프로 만화책을 품다
소설과 인문학 다음으로 만화책도 자주 읽는 편이다. 사실 학창 시절엔 유명 만화책들의 출간 시기가 너무 더뎌 잘 읽지 않았다. 전자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만화책들을 찾아보았는데 완결된 것들이 많아 뒤늦은 나이에 만화책을 즐기고 있다. 가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휴일에 귤 까먹으며 보는 완결작 만화는 꽤 즐거운 낙이다. 흑백 잉크 패널이기 때문에 종이로 된 만화책의 팬 선이 더 실감 나게 느껴져 기분이 좋다. 사람마다 개취가 있기 때문에 호불호가 있겠지만 내게는 오히려 컬러가 아닌 그레이 스케일의 만화책이 더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만화책은 종종 액션씬이나 중요 포인트에 양면을 하나의 컷으로 제공하는데 작은 기기에서는 이런 부분이 고질적으로 누락되곤 했다. 기존 6인치 페이퍼도 화면이 작아 세로 화면밖에 볼 수밖에 없어 아쉬웠는데 이번 페이퍼 프로는 가로 모드를 지원하므로 이런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준다. 적정 기기가 생겼다는 핑계로 만화책을 더 많이 살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다;;
페이퍼 프로 전문서를 품다
나는 글을 쓰는데 필요한 참고 서적을 많이 보는 편이다. 그러므로 항상 종이책을 펴두고 집게를 집어두거나 전자책을 켜두고 독서노트 기능을 활용하곤 하는데 둘 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글을 쓰는 화면과 참고해야 하는 서적에 시선을 번갈아가며 두 손으로 타자를 치는데 종이책과 작은 화면의 리더기는 결국 타자 치는 손의 자유를 뺏어가곤 한다. 간혹 PDF 전자책인 경우 픽스드 레이아웃 포맷의 특성상 글자 크기를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작은 화면의 기기는 더욱 골치 아파진다. 다행히 큰 화면이 지원되는 페이퍼 프로로 인해 PDF 가독성이 좋아졌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쓰는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실 큰 화면은 소설과 같은 문학을 읽을 때는 가독성이 조금 나아지는 정도지만 전문서나 만화를 볼 때는 확연하게 필요성의 차이가 드러나곤 한다. 만약 6인치와 7.8인치 두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6인치는 문학용 7.8인치는 인문서적, 학습서적, 만화용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아무리 7.8인치라고 해도 매거진과 같은 대형 판형의 책은 가독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종이책이나 PC를 이용하는 게 좋다.)
페이퍼 프로와 함께한 장소들
나는 내 취향들 중에 가장 마이너 한 것들을 사랑한다. 나를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전자책 독서도 그중 하나인데 어디를 가던 전자책 리더기를 가지고 다니는 편이다. 어떤 장소 혹은 어떤 상황에서 리더기가 활용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곤 한다. 카페, 미술관, 여행지, 지하철 모두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단, 자기 전에 누워서 볼 때만 조심하자. 어디 고정해두고 보는 게 아니라 손으로 들고 얼굴 위에서 본다면 조심해야 한다. 읽으면서 졸다가 페이퍼를 수없이 놓쳐봤는데 많이 아프다.
미술관에서 만난 페이퍼 프로
-대림 미술관
미술관에 갈 때 해당 전시작품과 관계가 있는 책이나 미술 관련 책을 읽는 편이다. 이들은 서로 연결되고 그 연결은 관람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실제 이번에 대림 미술관에 전시 중인 <Paper, Present:너를 위한 선물> 에가서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라는 책을 읽었다. 이런 전시를 열려면 어떤 전문가들이 준비하는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작품의 판단과 비평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등을 읽으며 천천히 작품을 관람했다. 이번 전시회는 페이퍼 아트가 주제인데 책 속 상상력들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종이로 만들어진 아날로그 한 전시 작품들 속에서 페이퍼 프로를 통해 현대 미술을 접하는 건 묘한 즐거움을 준다.
페이퍼 프로 카페의 여유를 품다
- 아지트 카페
- 사진에 나온 곳 : 스타벅스, 이디야커피랩, 빈브라더스 그 외 단골 카페
왜 굳이 시끄러운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집이 주는 분위기와 카페에서 받을 수 있는 분위기는 매우 다르고 장소마다 스며드는 백색소음과 매장의 BGM도 꽤 영향을 주는 편이다. 독서는 삶의 여유를 상징한다. 자본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책을 읽고 사색하는데 시간을 쏟을 수 있냐 없냐로 나뉠 수 있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일상에서 벗어나 최대한 삶의 여유 속에 빠져들고 싶어 한다. 좋은 커피 향기와 맛있는 베이커리 그리고 분위기 좋은 음악과 그에 어울리는 조명의 빈티지한 카페가 최적의 독서공간이 되어준다.
<어두울 때 빛나는 페이퍼 프로>
- 프론트라이트 밝기 조절
- 색온도 조절로 눈의 편안함 극대화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광고쟁이 최인아 씨의 카피다. 당시 성별로 섣부른 판단을 하는 사회에 실력으로 인정받는 아름다운 사람을 표현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진 카피인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잔잔한 울림이 있다. 최근 프로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무수한 2세대 상품들이 난무하고 있다. 좋은 디자인에 비싼 상표가 붙어있지만 실제 품질로서 그 가치를 다하는 경우는 드물다. 프로란 단지 외관이 예쁘고 고급스러운 것을 떠나 진정한 실력과 품격으로 인정받는 사람 혹은 제품에 붙여야 하는 칭호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퍼 프로는 완성도 면에서나 기술면에서나 프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전자책 독서가의 진정한 애장품이다. 프로는 프로를 곁에 둔다.